봄 감수성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 배달 교수의 인문학적 단상 3가지
봄 감수성은 봄이 주는 특별한 감정의 결입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그 봄 감수성은 설레는 방식 대신 낯설고 조용한 방향으로 찾아오곤 합니다. 이 글에서 전주 이팝나무 꽃터널 한가운데 막힌 배달 교수가 키츠, 엘리엇, 워즈워스를 붙잡고 건져 올린 인문학적 단상 3가지를 정리했습니다.
배달 교수의 봄 — 꽃보다 빠른 배송
전주 팔복동 철길 근처, 오후 5시였다. 올리브영 배송 물품을 가득 싣고 다음 배송지로 향하던 길이었다.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었고, 차는 앞도 옆도 뒤도 꽉 막혀 꼼짝달싹 못 했다. 창밖으로 고개를 조금 내밀자 코끝에 먼저 닿은 것은 달콤한 꽃향기가 아니라 매캐한 매연 냄새였다. 그리고 그 너머, 하얗게 부풀어 오른 이팝나무가 양쪽으로 줄지어 서 있었다. 전주 이팝나무 축제였다.
사람들은 꽃 아래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아이들은 뛰어다녔고, 연인들은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고 있었고, 휴대폰 셔터 소리가 쉼 없이 이어졌다. 봄 감수성이 충만한 풍경이었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창밖 이팝나무 사진을 한 장 찍었다.
별 감흥은 없었다.
그리고 솔직하게, 이런 생각이 먼저 들었다.
“왜 이렇게 사람이 많아. 짜증나네.”
수십 년 동안 대학 교단에서 영미문학을 강의해온 교수가, 키츠와 워즈워스와 엘리엇을 논하던 사람이, 꽃 앞에서 짜증을 냈다. 그 순간 나는 스스로가 너무나도 낯설었다. 그리고 그 낯섦이 이 글을 쓰게 만들었다.
봄 감수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나이가 들면 사라지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무언가로 바뀌는 것인가. 60대에 접어든 지금, 전주 수십 km를 매일 누비는 딜리버리 집시 교수가 꽃터널 한가운데서 건진 세 가지 단상이다.

첫 번째 단상 — 봄 감수성은 소멸하는가: 키츠가 남긴 질문
삼십 대의 나는 달랐다. 꽃이 폈다는 소식을 들으면 시간을 내서라도 찾아갔다. 아내와 아이들의 손을 잡고 꽃구경을 나가며 봄을 행사처럼 챙겼다. 봄바람 한 번에도 몸이 먼저 반응했다. 봄 감수성이 살아 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같은 꽃 아래에 있으면서도 다른 방향을 보고 있었다. 이 정체를 언제 빠져나갈 수 있을지, 다음 배송지까지 몇 분이나 걸릴지. 꽃과 인파와 자동차들 사이를 그냥 “통과”하고 있었다. 전주의 거리를 매일 수십 km를 누비는 딜리버리 집시로 살면서, 나는 어느 순간부터 봄을 멈추어 보는 사람이 아니라 지나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 핸들 위의 인문학 참조]
영국 낭만주의 시인 존 키츠(John Keats)는 「엔디미온」(“Endymion”, 1818)의 첫 행에서 이렇게 썼다.
A thing of beauty is a joy for ever:
Its loveliness increases; it will never
Pass into nothingness; but still will keep
A bower quiet for us, and a sleep
Full of sweet dreams, and health, and quiet breathing.
아름다운 것은 영원한 기쁨이다.
그 아름다움은 날이 갈수록 깊어지고,
결코 무(無)로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를 위해 고요한 쉼터 하나를 남겨두고,
달콤한 꿈과 건강함과, 조용하고 평온한 숨결로 가득 찬 잠 한 자락을 선물한다.
스물다섯에 결핵으로 세상을 뜬 키츠에게 봄 감수성은 생존의 문제였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이 곧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그런데 나는 살아 있으면서도, 아름다움 앞에서 잠잠하다.
혹시 이것이 키츠가 말한 “joy for ever”의 다른 얼굴은 아닐까. 기쁨이 폭발하지 않는다고 해서 사라진 것은 아닐 수 있다. 봄 감수성이 가슴에서 가라앉아 뼛속으로 내려간 것일 수도 있다.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는 일찍이 이렇게 말했다. 젊을 때 자연은 감각으로 들어오지만, 나이가 들면 자연은 기억과 사유로 들어온다고. 예전의 나는 꽃을 “봤고”, 지금의 나는 꽃을 보면서 “예전의 나”를 떠올린다. 이것은 봄 감수성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즉각적인 반응에서 조용한 반추로 이동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확신하지는 못한다. 솔직히, 그냥 피곤한 것일 수도 있으니까.
두 번째 단상 —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기러기 아빠와 봄 감수성
T.S. 엘리엇(T.S. Eliot)은 『황무지』(The Waste Land, 1922)를 이렇게 열었다.
April is the cruellest month,
breeding Lilacs out of the dead land, mixing
Memory and desire, stirring
Dull roots with spring rain.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망을 뒤섞으며,
봄비로 잠든 뿌리를 흔들어 깨운다.
보통 우리는 봄을 희망의 계절이라 배운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 봄은 오히려 그 반대다. 봄이 무언가를 억지로 일깨우기 때문에 잔인하다. 이미 지쳐 있는 사람에게 봄은 감정을 다시 깨우라고 요구하고, 이미 외로운 사람에게는 축제를 즐기는 인파를 보여주며 소외감을 배가시킨다.

기러기 아빠로 전주에 혼자 산 지 여러 해가 됐다. 아내와 딸, 그리고 강아지 모카(Mocha)는 캐나다 런던(London, Ontario)에 있다. 학교 방학 때마다 그곳에 가지만, 봄은 언제나 전주에서 혼자 맞는다. [→ 집이란 무엇인가 참조]
봄 감수성을 함께 나눌 사람이 옆에 없는 것이, 봄을 이토록 잠잠하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함께 서서 사진을 찍어줄 사람이 없다는 단순한 사실이, 어느 순간부터 계절을 감각하는 방식까지 바꾸어 놓고 있었다.
삼십 대에 아이들의 손을 잡고 꽃구경을 나갔던 그 기억이, 이팝나무 아래에서 혼자 셔터를 누르는 지금의 나를 더 낯설게 만든다. 엘리엇이 말한 “memory and desire(추억과 욕망)의 혼재”는 바로 이것이었을까. 아름다움이 있던 자리에 결핍이 들어선 느낌.
어쩌면 내게 잔인한 것은 이팝나무 꽃의 화려함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아름다움에 반응할 여유를 잃어버린 나 자신의 메마름인지도 모른다.
세 번째 단상 — 봄 감수성의 방향이 바뀌다: 배즙 한 병과 경비원의 미소
그날 배송을 하다가 이팝나무 축제 현장과 가까운 어느 아파트 단지의 경비실 앞에 섰다. 이팝나무 축제 인파가 몰려들며 단지내에 불법 주차 차량을 통제하느라 연신 땀을 닦던 경비원 아저씨. 나는 내 차에 배달 물품 옆에 있던 시원한 배즙 음료 하나를 꺼내 건넸다.
“더우시죠. 이거 하나 드세요.”
아저씨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웃으며 받았다. 그분의 눈가에 번지던 짧은 미소. 불과 몇 초였지만, 그것이 이팝나무 꽃보다 훨씬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하얀 꽃보다 그 미소가 더 선명하게 기억난다.
그 순간 깨달았다. 어쩌면 나이가 든다는 것은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이 머무는 자리가 달라지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것을. 예전에는 꽃이 아름다웠다. 지금은 사람의 표정이 더 아름답다.
스타인벡(John Steinbeck)은 『통조림 공장가』(Cannery Row, 1945)에서 이렇게 관찰한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제각각이듯, 기쁨을 느끼는 방식도 제각각이라고. [→ 통조림 공장가 포스트 참조] 축제장을 찾아 꽃 아래 서는 것만이 봄을 사는 방식은 아닐 것이다. 차창 너머로 그 풍경을 스치면서, 그 아름다움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 봄을 느끼지 못하는 자신을 조용히 관찰하는 것. 그것 또한 중년이 가질 수 있는 봄 감수성의 한 형태다.
봄 감수성의 가장 성숙한 형태 — 봄은 내가 없는 자리에서도 피고 진다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는 「무지개」(“My Heart Leaps Up“, 1807)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My heart leaps up when I behold
A rainbow in the sky:
So was it when my life began;
So is it now I am a man;
So be it when I shall grow old,
Or let me die!
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
하늘에 무지개가 걸릴 때 내 가슴은 뛴다.
삶이 시작되던 그 시절에도 그러했고,
어른이 된 지금 이 순간에도 그러하며,
늙어서도 그러하기를 바란다.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죽음을 달라.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워즈워스는 나이가 들어서도 무지개를 보고 가슴이 뛰지 않는다면 차라리 죽음을 달라고 절규했다. 그렇다면 이팝나무 꽃터널 아래에서 아무런 동요도 없었던 나는, 워즈워스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그 감각의 소멸 앞에 서 있는 것일까.
아마 아닐 것이다.
어린 시절의 설렘이 떠난 자리에는 삶을 지탱하는 단단한 책임감이 들어선다. 우리는 그것을 성숙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꽃 앞에서 환호성을 지르는 대신, 조용히 그 자리를 기억하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는 어른의 성숙 말이다. 봄 감수성은 우리가 설레든 설레지 않든 왔다가 간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아는 것이, 어쩌면 봄 감수성의 가장 성숙한 형태일지도 모른다.

결국 나는 그 꽃터널 길을 빠져나왔다. 꽃은 여전히 피어 있었고, 사람들은 여전히 웃고 있었고, 나는 다시 올리브영 배송을 이어갔다.
그날 저녁, 혼자 밥을 먹으면서 낮의 풍경을 다시 떠올렸다. 꽃은 분명히 거기 있었다. 아름다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내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달라졌을 뿐이다.
그날 밤, 캐나다에 있는 딸에게서 카톡이 왔다.
“아빠, 거기 지금 꽃 많이 폈어?”
나는 신호대기 중에 무심하게 찍어두었던 이팝나무 사진을 하나 골라 보냈다.
잠시 후 두 글자가 화면에 떴다.
“예쁘다.”
사진 속에는 꽃만 찍혀 있었다. 교통체증도 없었고, 배송 시간도 없었고, 혼자 사는 전주의 저녁도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모든 것이 그 사진 안에 함께 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래. 예쁘긴 했다.
창밖에는 여전히 하얀 이팝나무 꽃들이 어둠 속에서 등불처럼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봄 감수성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다만 삶의 무게만큼 깊고 조용해진 것이었다.
오월의 봄은, 내가 없는 자리에서도 피고 진다. 그리고 그 사실을 담담히 생각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충분히 봄의 한가운데를 살아가고 있는 것 아닐까.
Read Deep, Speak Well — 문학을 깊이 읽는 사람은 계절도 깊이 읽는다.
[내부 링크]
→ 기러기 아빠 관련 Life & Humanities 이전 포스트
→ 『생쥐와 인간』 컬리 부인 — 이름 없는 3가지 이유
→ 핸들 위의 인문학 — 배달 교수가 전주 44km에서 배운 3가지 삶의 무게
→ 집이란 무엇인가? — 여산 휴게소를 지날 때마다 드는 3가지 감각
→ 인생 2막 — 62세 교수가 디지털에 미친 진짜 이유
→ 스타인벡과 『통조림 공장가』 — 몬터레이 골목의 인간학
→ 찰리와 함께한 여행 — 스타인벡이 58세에 트럭을 몬 이유
[외부 링크]
→ 존 키츠 「엔디미온」 위키소스 원문
→ 2026 전주 이팝나무 축제 공식 안내

한 줄 요약: This text means that many people in the world usually just pass away the beauty of the world.
내가 배운 표현: let me die 죽게 내버려두세요
내 생각: 사람만이 가지는 아름다움은 제각각이며 보는 시각에 따라 그 아름다움이 달라질 수 있음을 알았다. 어린 시절의 감수성이 어른의 내면을 만들어낸다는 것이 인성적이고 공감되게 만들었다.
학번: 26510063 / 이름: 오채원
한줄 요약: Spring sensibility in our later years is not about losing our emotions, but about learning to appreciate beauty quietly while carrying the weight of life’s responsibilities.
내가 배운 표현: Pass through (스쳐지나가다 / 통과하다)
내 생각: 예전처럼 꽃을 보고 설레지 않는건 감정이 메마른 게 아니라 삶의 경험이 쌓이면서 내면이 더 깊고 단단해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