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들 위의 인문학 — 전주 밤거리를 달리는 배달 교수의 야간 운전 장면

핸들 위의 인문학 — 배달 교수가 전주 44km에서 배운 3가지 삶의 무게

핸들 위의 인문학은 강의실이 아닌 전주의 밤길에서 시작된다. 30년 경력의 스타인벡 연구자가 올리브영 배달기사로 변신하는 오후 4시, 이 역설 속에서 책상 앞에서는 결코 열리지 않던 사유의 문이 열린다. 이 글에서는 노동과 고독, 그리고 찰나의 연결이 어떻게 인문학적 통찰로 이어지는지를 정리했다.

올리브영 오늘드림 배달 차량 뒷좌석 — 30여 개 배달 물건

영어교육과 교수가 배달 알바를 한다. 존 스타인벡 연구로 30년을 보낸 사람이 올리브영 택배를 나의 애마 올란도에 싣는다. 이 두 문장을 나란히 놓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잠시 멈칫한다. 나도 처음엔 그랬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 두 문장이 나에게는 전혀 모순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의 문장처럼 읽힌다.

오후 4시, 나는 두 개의 세계 사이에 선다.

강의실을 나서면 다른 사람이 된다. 아니 — 어쩌면 더 솔직한 내가 된다. 학교 안에서 나는 30년 동안 강단에 선 영어교육과 교수이자 박사 학위를 가진 존 스타인벡 연구 전문가다. ‘황박사 잉글리쉬 TV’라는 유튜버로도 활동하지만, 오후 4시를 기점으로 나의 정체성은 완전히 교차한다. 학교 문을 나서는 순간, 나는 전주 전역을 누비는 올리브영 배송기사, 즉 ‘딜리버리 집시’가 된다.

핸들 위의 인문학은 이 두 정체성이 교차하는 그 순간에 태어난다.

삶의 무게 1 — 핸들 위의 인문학, 노동이 사유의 문을 열다

자동차 뒷문이 무겁게 닫히는 소리와 함께 낡은 차의 뒷자리가 이내 묵직해졌다. 올리브영 물류센터에서 한 아름 실어온 60여 개의 물건들 — 선크림, 마스크팩, 립밸런서, 향수. 누군가의 오늘을 아름답게 가꾸어줄 것들이 나의 올란도 자동차 뒷좌석을 가득 채웠다.

시동을 걸었다. CBS 음악FM 「배미향의 저녁스케치」가 시작되고, 마이클 부블레(Michael Bublé)의 목소리가 차 안의 적막을 채웠다. “Save the Last Dance for Me.”

핸들 위의 인문학이 이렇게 시작된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사실 나는 평생 운동을 기피해 온 전형적인 정적(靜的)인 선비 체질이다. 학교에서 자동차로 고작 5분 거리인 집조차 늘 차를 타고 다녔고, 걷거나 뛰는 행위 자체를 귀찮아했다. 30년이라는 세월 동안 대학 강의실과 연구실 책상은 나의 안식처였지만, 동시에 나를 가두는 벽이었다. 그 댓가는 혹독했다. 혈압, 당뇨, 고지혈증 — 약봉지가 하나씩 늘어났고, 15년 단골 병원 의사는 진료실에서 만날 때마다 같은 말을 반복했다.

“꼭 운동하셔야 합니다.”

학교 헬스장에 등록해 러닝머신 위를 뛰어보기도 했지만, 목적지 없이 제자리를 걷는 행위는 나에게 견디기 힘든 고역이었다. 결국 선택한 것이 배달 알바였다. 목적지를 향해 실제로 몸을 움직이는 이 경험은, 나에게 생존을 넘어선 ‘생동(生動)’의 신호로 다가왔다.

강의가 없는 날 오후 4시, 센터에서 물건을 싣고 애플리케이션이 지정한 동선을 따라 이동한다. 차에서 내리고 타며, 엘리베이터가 없는 3~4층 빌라 계단을 숨차게 오르내린다. 문 앞에 물건을 두고 배달 완료 인증 사진을 찍는 2~3시간의 여정.

전주 배달 교수 차량 내부 — 딜리버리 집시 주행 중

지난 5월 2일 토요일의 운행일지에는 ‘2시간 58분, 44.0km’라는 숫자가 선명히 찍혀 있었다. 효자동에서 출발해 여의동, 팔복동, 만성동을 누빈 그 붉은 이동 경로는 지도 위에서 꼭 하나의 항해 지도처럼 보였다. 아파트 계단을 오르내릴 때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땀방울은, 내가 매일 복용하는 약보다 훨씬 더 선명한 실존의 신호를 심장에 보내왔다.

2026년 5월 2일 전주 배달 44km 운행 경로 지도 — 핸들 위의 인문학

노동이 사유를 방해한다는 관념은 틀렸다. 오히려 책상 앞에서는 절대 떠오르지 않던 날것의 사유들이, 핸들을 잡은 손바닥 위에서 불쑥불쑥 고개를 들었다. 핸들 위의 인문학은 그렇게 근육의 비명 속에서 조용히 자라난다.

삶의 무게 2 — 고독은 연결을 더 선명하게 만든다

핸들 위의 인문학의 두 번째 무게는 고독에서 온다.
19시 39분. 전주 시내의 좁은 골목을 빠져나와 아파트 단지로 접어드는 순간, 냇 킹 콜(Nat King Cole)의 “Too Young“이 흘러나왔다. 너무 젊어서 아직 사랑을 모른다던 그 노래 속에서, 나는 문득 존 스타인벡의 처녀작 『황금의 잔』(Cup of Gold)의 주인공 헨리 모건을 떠올렸다.

『황금의 잔』을 30년 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헨리 모건이 왜 카리브해를 선택했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이미 가진 것이 있었다. 안전한 땅이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바다로 나갔다. 그 선택을 나는 오랫동안 야망이라고만 읽었다.

배달을 시작하면서 다시 읽었다. 아, 이건 야망이 아니었구나.

헨리 모건은 배를 타고 있을 때 가장 자유로웠다.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감각 — 그게 핵심이었다. 젊은 시절 카리브해를 장악하고 파나마를 함락하며 황금과 명예를 거머쥐었던 그는, 인생의 황혼기에 이르러서야 깨달았다. 자신이 진정으로 갈구했던 것은 황금잔에 담긴 달이 아니라, 그 달을 바라보며 삶의 가늠할 수 없는 것들을 깊이 숙고할 수 있는 고독한 시간 자체였다는 것을.

핸들을 잡은 채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17세기 헨리 모건의 카리브해 항로와 2026년 나의 전주 배달 경로는 축척만 다를 뿐, 본질이 같다. 그는 항해했고, 나는 운행한다. 그는 보물을 찾았고, 나는 올리브영 물건을 배달한다. 하지만 과연 우리의 삶이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25년 넘게 전주에 살았지만 나는 여전히 이방인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젊었을 때는 달랐다. 학생들과 술잔을 기울이고, 동료 교수들과 늦은 밤까지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풍경이 바뀌었다. 학생들은 너무 어려졌다. 아니, 내가 너무 늙었다. 젊은 교수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괜히 “나 때는 말이야”가 나올 것 같아 말을 아끼게 된다. 비슷한 연배의 친구들은 저녁만 되면 집으로 향한다.

퇴근 후 연구실 불을 끄고 주차장으로 걸어갈 때면 가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오늘 저녁은 누구와 이야기할까. 그런데 답은 늘 같았다. 아무도 없었다. 기러기 아빠의 전주 밤은 생각보다 길고, 생각보다 조용하다.

캐나다 런던. 그곳에는 아내와 딸,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우리 집 마스코트인 크림색 푸들 모카가 있다. 방학 때마다 캐나다로 날아가 가족과 재회하는 그 찰나의 환희를 위해, 나는 이 고독을 기꺼이 실어 나른다. 부수입이라는 작은 실익을 쫓는 것처럼 보이지만 — 사실은 가족이라는 나만의 성배(Holy Grail)를 지켜내기 위한 밤의 항해다.

어쩌면 나는 운동이 아니라 고독을 견디기 위한 방법을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핸들을 잡고 있는 동안은, 혼자라는 느낌이 조금 옅어진다.

스타인벡이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에서 그린 조드 가족(The Joads)을 생각한다. 그들은 고향을 잃고 Route 66을 달렸다. 목적지를 향해 가는 그 이동 자체가 그들의 생존이었다. 나는 지금, 충분히 늙어서 알고 있다. 사랑한다는 것은 곁에 있는 것만이 아니라는 걸.

카펜터즈(Carpenters)의 “Close to You“가 흘러나올 때는 멀리 있는 아내의 얼굴이 겹쳤고,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의 “I Just Called to Say I Love You“가 울릴 때는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다 이내 내려놓았다. 속도가 느려질수록 생각은 깊어진다. 고립된 차 안의 공간은 대중음악의 선율을 타고 거대한 인문학적 강당으로 변모해 간다.

 핸들 위의 인문학 — 전주 밤길을 달리는 배달 교수 황치복

삶의 무게 3 — 가장 짧은 연결이 가장 오래 남는다

오늘도 60여 가구의 현관문 앞에 섰다.

배달 교수의 현관문 인증샷 60장 — 핸들 위의 인문학 연결의 기록

물건을 내려놓고 배달 완료 인증 사진을 찍으려는 찰나, 덜컥 문이 열릴 때가 있다. 서로 움찔하며 놀라는 그 2~3초. 피곤에 지친 주부의 얼굴, 문틈으로 수줍게 물건을 받아 쥐는 대학생, “아이고, 수고하십니다”라며 따뜻하게 허리를 굽히는 어르신의 인사. 길어야 3초. 문은 다시 닫힌다.

그 찰나가 묘하게 문학적이다.

스타인벡은 평생 이 순간을 그려 왔다. 인간과 인간이 스치는 그 짧은 접촉 — 그 온도. 『분노의 포도』에서 조드 가족이 길 위에서 낯선 이들과 나누는 가공되지 않은 교감, 『통조림 공장가』(Cannery Row)의 맥과 소년들이 만들어내는 허름하지만 따뜻한 연대. 그것이 위대한 문학이 되는 이유를 나는 30년간 연구실에서 설명해 왔다. 그런데 현관문 앞에서 2초 동안 눈을 마주치면서 — 비로소 몸으로 이해했다.

스마트폰 카메라로 찍어 내리는 현관문 앞의 사진들은 단순한 배달 인증샷이 아니다. 고립되어 있던 한 인간이, 또 다른 이의 일상에 작은 기쁨을 배달했다는 존재론적인 연결의 기록이다. 이 핸들 위의 인문학이 나에게 가르쳐준 것은 고독의 쓸쓸함이 아니라, 타인과 연결되어 있다는 안도감과 가치였다. 이것이 핸들 위의 인문학이 나에게 가르쳐준 세 번째 무게이다.

올리브영 오늘드림 배달 봉투 — 누군가의 오늘을 배달하다

핸들을 놓으며 — 가늠할 수 없는 것들을 숙고하는 밤

19시 54분.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의 “And I Love You So.”

마지막 배송물건을 어느 아파트의 문 앞에 내려놓고 운전석으로 돌아왔을 때 이 노래가 흘렀다. 화려한 무대 뒤의 깊은 외로움을 아는 듯한 그의 쓸쓸한 음색을 들으며, 오늘 내가 마주한 수많은 현관문들을 복기했다.

시동을 껐다. 차 안이 조용해졌다. 전주의 밤이 창밖에 고요히 내려앉았다.

스마트폰 화면에 남은 44.0km의 붉은 선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이것은 단순한 물류의 이동 경로가 아니다. 오늘 하루 내가 이 땅 위에서 성실하게 살아낸 시간의 흔적이자, 근육의 비명으로 써 내려간 삶의 궤적이다. 삶은 어디에 도착했느냐보다 어떤 경로를 지나왔느냐로 남는다.

헨리 모건이 죽기 직전 그토록 갈구했던 평온 — 스타인벡은 이렇게 썼다. 그는 가늠할 수 없는 것들을 깊이 숙고할 수 있는 시간을 원했다고. 나는 이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학자의 눈으로 분석했다. 지금 나는 배달 교수의 손으로, 매일 밤 이 문장을 산다. 이것이 핸들 위의 인문학이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이다.

생각해 보면 인생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나르는 과정이다. 젊은 시절에는 지식을 날랐다.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문학을 전달했다. 중년에는 책임을 날랐다. 가족을 위해 일했고 아이들을 키웠다. 그리고 지금은 물건을 나른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물건만은 아니다. 그 안에는 누군가의 기대가 있고, 생활이 있고, 작은 기쁨이 있다.

우리는 사랑을 나르고, 지식을 나르고, 때로는 각자의 고독을 실어 나른다. 나는 오늘 무엇을 날랐고, 내일은 또 무엇을 실어 나를 것인가.

언젠가 캐나다 런던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다시 한 지붕 아래 살게 되는 그날까지, 나는 전주의 밤길을 달릴 것이다. 그 길 위에서 조금씩, 삶이라는 긴 항해의 의미를 배울 것이다. 내일 오후 4시, 나의 올란도는 또 누구를 향해 핸들 위의 인문학의 시동을 걸게 될까.

기러기 아빠의 밤은 이렇게 저문다.

길 위에서 떠오르는 질문은 결국 하나로 모입니다. “집이란 무엇인가.” → 집이란 무엇인가

[내부 링크]
이전 글: 존 스타인벡 『황금의 잔』 문학 분석 — 위대한 작가의 탄생을 알린 5가지 핵심 코드
→ 관련 글: 인문학 에세이 가이드 — 일상을 사유로 바꾸는 3가지 시선

찰리와 함께한 여행 — 존 스타인벡이 58세에 트럭을 몬 이유

[외부 링크]
CBS 배미향의 저녁스케치 공식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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