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란 무엇인가? — 교황과 트럼프, 카노사의 눈밭에서 찾은 진짜 품격의 조건 3가지
왕관은 언제나 무겁습니다.
그래서 왕들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왕관은 오래 살아남습니다. 교황의 붉은 예복도, 대통령의 푸른 정장도, 황제의 황금 왕관도 결국 같은 질문 앞에 섭니다. 그 사람이 진정한 권위를 가진 것인가, 아니면 권력을 가진 것인가.
며칠 전 스마트폰 화면을 무심코 넘기다 저는 스크롤을 멈췄습니다. 붉은 예복을 입은 남자가 붉은 카펫 위를 걷고 있었습니다. 양옆에는 군인들이 도열해 있고, 가슴에는 금빛 십자가가 빛났습니다. 세속의 권력과 신성한 권위가 한 프레임 안에 담긴 장면이었습니다. 사진 한 장이 사람을 멈춰 세울 때가 있는데, 그날이 그런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교황을 향해, 한 나라의 대통령이 소셜미디어에 이렇게 쏘아붙였습니다.
“그는 범죄에 물렀고, 외교 정책은 최악이다.”
정치 뉴스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장면에서 정치보다 훨씬 큰 질문을 보았습니다. 권위란 무엇인가. 직함인가, 권력인가, 아니면 전혀 다른 무엇인가. 이 권위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뉴스를 보는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1077년 겨울, 카노사의 눈밭에서
권위란 무엇인가를 이해하려면 먼저 이 장면부터 떠올려야 합니다. 1077년 겨울,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 앞에서 사흘 동안 눈밭에 서 있었습니다. 군대도, 영토도, 황제의 칙령도 소용없었습니다. 황제는 맨발로 무릎을 꿇었고, 교황은 성문을 열어줄 때를 기다렸습니다. 카노사의 굴욕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단순한 중세사의 한 페이지가 아닙니다. 권력이 권위 앞에서 멈춰 선 순간이었습니다. 권위란 무엇인가에 대한 역사의 가장 극적인 답변이기도 했습니다.

현대 민주주의는 정교분리(Separation of Church and State)의 원칙을 세웠지만, 원칙과 현실은 늘 달랐습니다. 정치인은 종교를 이용하고, 종교는 정치에 목소리를 냅니다. 그 경계는 언제나 흐릿했습니다.
트럼프와 교황의 충돌이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2016년 교황 프란치스코가 “장벽을 쌓는 것은 기독교적이지 않다”고 하자, 트럼프는 “창피스럽다”고 맞받았습니다. 그해 트럼프는 대통령에 당선됐습니다. 하지만 이번은 결이 다릅니다. CNN 분석가 에런 블레이크의 지적처럼 [외부 링크], 트럼프는 2024년 대선에서 가톨릭 유권자의 55~59%를 득표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수십 년 만에 가장 높은 가톨릭 지지율입니다. 바로 그 지지층을 향해, 이번엔 단순한 정책 비판이 아니라 교황의 자격 자체를 흔드는 발언을 쏟아낸 셈입니다.
2026년 4월, 교황이 이란 전쟁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비판하자 트럼프는 AI로 생성한 이미지를 소셜미디어에 올렸습니다. 자신이 예수처럼 환자를 치유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손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습니다.

이 이미지는 가톨릭 신자들은 물론 트럼프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즉각적인 반발을 불렀습니다. 트럼프의 종교자유위원회 소속 주교 로버트 배런조차 “완전히 부적절하고 무례하다”며 공개 사과를 요구했습니다. 결국 트럼프는 이미지를 삭제하면서 “의사를 묘사한 거라 생각했다”고 해명했습니다. 하지만 손끝에서 신성한 빛을 발산하는 현대의 의사를 상상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종교가 있든 없든, 인류가 수천 년간 쌓아온 신성(Sacredness)의 영역이 한 개인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도구화되는 순간, 우리는 설명하기 어려운 거부감을 느낍니다. 이것은 특정 정치인을 좋아하고 싫어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권위란 무엇인가를 묻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감각입니다. 인간의 자아(Ego)가 감히 침범할 수 없는 초월적 영역을 건드릴 때 발생하는 거대한 오만, 즉 휴브리스(Hubris)를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힘(Power)과 권위(Authority) — 우리가 혼동하는 두 가지
권위란 무엇인가를 이해하려면, 먼저 힘과 권위의 차이부터 짚어야 합니다.
권력은 남을 움직일 수 있는 힘입니다. 명령할 수 있고, 처벌할 수 있고, 자원을 배분할 수 있습니다. 권력은 밖으로 뻗어 나갑니다. 누군가를 누르고, 밀어붙이고, 복종하게 만듭니다. 반면 권위는 안에서부터 생깁니다. 강요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인정하는 무게입니다. 어떤 사람의 말이 크지 않아도 오래 남는 이유, 어떤 사람이 자리를 떠난 뒤에도 그 이름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번 충돌에서 트럼프는 교황을 향해 “약하다(Weak)”, “범죄와 외교에 끔찍하다”며 세속적인 힘의 척도로 비난을 쏟아냈습니다. 반면 교황 레오 14세의 대응은 달랐습니다. 비행기 안에서 기자들에게 조용히 말했습니다. “나는 트럼프 행정부가 두렵지 않다. 나는 그저 복음을 전할 뿐이다.”
자, 여기서 질문 하나. 누가 더 강해 보이십니까?
힘(Power)은 상대방을 억누르고, 비난하고, 자신의 우월함을 증명하려는 외적 에너지입니다. 권위(Authority)는 내면의 신념과 도덕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비난 속에서도 평온을 유지하는 힘입니다. 권위란 무엇인가의 답은 여기서 시작됩니다. 권위는 자신을 크게 보이게 만드는 기술이 아닙니다. 자신을 절제할 줄 아는 힘입니다.
권위의 어원인 라틴어 Auctoritas는 본래 타인을 성장시키고 북돋우는 힘을 뜻했습니다. 누군가를 짓밟아 올라서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로 타인에게 귀감이 되는 것. 그것이 진정한 권위의 시작이었습니다.
법을 집행하는 경찰관이 제복과 권총을 통해 행사하는 것은 정당한 법적 힘입니다. 그러나 제복을 입었다고 해서 모든 시민이 그 경찰관의 인격까지 진심으로 존중하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아무런 직함이 없어도 그가 입을 열어 조용히 말할 때 주변의 모든 사람이 자연스럽게 귀를 기울이게 되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권위가 있기 때문입니다. 권위란 무엇인가를 오래 생각해온 사람이라면, 이 차이를 직감적으로 압니다. 그리고 그 권위는 오랜 시간이 쌓아 만든 것입니다.
스타인벡이 문학으로 이미 경고한 권위란 무엇인가의 답
권위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존 스타인벡(John Steinbeck)은 문학으로 먼저 답했습니다.
스타인벡의 『불만의 겨울』(The Winter of Our Discontent)에는 겉으로 존경받는 지역 유지들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 화려한 겉모습의 장막을 걷어내면 위선과 탐욕으로 가득 찬 인간들의 실체가 드러납니다. 겉모습의 권위는 남아 있지만 내면의 정당성은 사라진 상태입니다. 스타인벡이 날카롭게 포착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인간이 스스로를 합리화하기 시작하는 순간의 목소리. “이번 한 번쯤은 괜찮다.” “나는 그럴 자격이 있다.” “내가 하는 일은 결국 좋은 결과를 낳을 것이다.” 이 말들이 쌓이면 권위는 사라지고, 자기 숭배만 남습니다. [불만의 겨울 관련 내부 링크]
스타인벡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권위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은 간단합니다. 권위는 직함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도덕적 정당성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그 정당성이 사라지는 순간, 권위는 껍데기만 남습니다.
『에덴의 동쪽』(East of Eden)에서도 이 통찰은 이어집니다. 스타인벡은 인간을 선과 악 사이에서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존재로 봤습니다. 그러나 스스로를 우상화하는 순간, 인간은 타인의 고통을 진심으로 이해하기보다 자신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배경으로 활용하게 된다고 경고했습니다. [에덴의 동쪽 관련 내부 링크]
저는 오래전부터 스타인벡을 연구해오면서, 그가 권력자를 그릴 때 늘 한 가지 공통점을 남긴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진짜 힘을 가진 인물일수록, 그 힘을 과시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침묵하거나, 기다리거나, 물러섭니다. 『에덴의 동쪽』의 리(Lee)가 그랬습니다. 리는 하인이었지만, 이야기 전체에서 가장 권위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직함이 없었기에 오히려 자유로웠고, 자유로웠기에 더 깊은 도덕적 무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소셜미디어 화면 속에서 AI 기술의 힘을 빌려 자신을 신성한 치유자로 포장했던 그 장면. 스타인벡이 가장 경계했던 인간의 오류, 휴브리스와 너무나 닮아 있습니다.
권위주의를 무너뜨리면서 권위까지 잃어버린 시대

솔직히 말하면, 권위의 붕괴가 전적으로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과거의 권위는 종종 억압과 위선의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어른이니까 무조건 맞다.” “교수니까 무조건 옳다.” “지도자니까 비판하면 안 된다.” 이런 시대는 끝났고, 그건 분명 건강한 변화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구분이 있습니다. 권위주의(authoritarianism)를 무너뜨리는 것과 권위(authority) 자체를 없애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권위주의는 타인을 누릅니다. 권위는 타인을 일으켜 세웁니다. 권위주의는 질문을 막습니다. 권위는 더 깊은 질문을 가능하게 합니다. 권위주의는 복종을 요구하지만, 진짜 권위는 존중을 불러옵니다.
우리는 권위주의를 거부하면서, 권위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조차 함께 폐기해버렸습니다.

오늘날 SNS에서는 대통령도 밈(meme)이 되고, 교황도 댓글의 대상이 되며, 교수도 익명의 별점으로 평가받는 콘텐츠가 됩니다. 모든 것이 평평해졌습니다. 그러나 이 평등함이 도를 지나쳐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존엄마저 집어삼킬 때, 우리는 위기를 맞이합니다.
평등이 지나치면 존중까지 사라집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정확히 세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절제(self-restraint), 품위(dignity), 그리고 책임(responsibility). 이 셋이 오랜 시간 쌓여 권위가 됩니다. 권위란 무엇인가를 한 문장으로 정의하자면, 바로 이 세 가지가 삶 속에서 일관되게 지켜질 때 타인이 자연스럽게 인정하게 되는 인격의 무게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세 가지를 동시에 가장 빠른 속도로 소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 더 자유로워졌을까요? 아니면 서로를 믿지 못하고 냉소하는 사회의 파편으로 남게 되었을까요?
마치며 — 권위가 사라진 게 아니라, 기다리는 마음이 사라졌다
강단에 처음 섰을 때, 저는 직함이 어느 정도 권위를 만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앞에 서 있으면, 가르치면, 평가하면 자연스럽게 권위가 생긴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직함에 오래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결국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은 그 사람의 태도입니다.
틀렸을 때 인정하는가.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가. 자기 말에 책임을 지는가. 타인을 낮추지 않고도 자기 생각을 지킬 수 있는가. 이런 작은 태도들이 켜켜이 쌓여 권위가 됩니다. 권위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은 결국 이 질문들 속에 있습니다. [집이란 무엇인가? — 여산 휴게소를 지날 때마다 몸이 먼저 대답하는 3가지 감각]
교황 레오 14세가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열렬한 팬이며 익숙한 영어로 대중과 격의 없이 소통한다는 기사 속 디테일이 흥미롭습니다. 그의 권위가 구름 위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이 숨 쉬는 일상과 소통의 토양에 뿌리 내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었습니다.
기술이 아무리 화려해도 그 속에 담긴 본질이 공허하다면, 그것은 권위가 아니라 조작에 불과합니다. 스스로 왕관을 머리에 쓰고 내가 왕이라고 목청을 높이는 자에게는 권위가 생기지 않습니다. 진정한 권위는 타인이 강요 없이 기꺼이 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일 때 비로소 완성되는 법입니다.
트럼프와 교황 레오 14세의 충돌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이것이 한낱 정치적 해프닝으로 끝날지, 종교와 정치의 관계를 다시 쓰는 신호탄이 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권위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사라진 사회의 위기는 저절로 해소되지 않습니다. 역사가 그걸 증명해왔고, 오늘 아침 우리가 스마트폰으로 마주하는 뉴스도 그걸 다시 보여주고 있습니다.
권위가 사라진 시대라고들 말합니다. 하지만 정말 사라진 것은 권위였을까요. 어쩌면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권위를 감당할 만한 사람을 기다리는 마음인지도 모릅니다. [노견의 시간이 가르쳐준 3가지 — 15년을 함께 늙어온 모카]
Read Deep, Speak Well. 눈에 보이는 이미지 너머, 그 이면의 인격과 의도를 읽어내는 연습. 그것이 우리 시대에 가장 필요한 혜안인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은 요즘 어떤 종류의 권위에 더 마음이 끌리십니까? 목소리 큰 힘인가요, 아니면 조용한 품격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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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분리 원칙(Separation of Church and St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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