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지갑 위에 놓인 영수증과 와인잔 — 체면과 소비의 아이러니

체면 때문에 지갑을 열었던 날 — 우리가 없으면서도 있는 척하는 3가지 이유

체면은 이상한 것이다. 지갑이 텅 비어 있어도 손은 자연스럽게 카드를 꺼낸다. 하지만 나이와 경험이 쌓이면 그 손이 떨리는 걸 느끼게 되는 순간이 온다. 이 글에서 체면이 우리 삶을 어떻게 지배하는지, 그리고 우리가 왜 알면서도 지갑을 여는지에 관한 인문학적 통찰 3가지를 정리했다.

오래된 기억 하나가 있다. 학회가 끝난 뒤의 뒤풀이 자리였다. 선배들이 둘러앉았고 술과 안주가 오갔다. 계산서가 왔을 때, 누군가 주머니를 뒤적였고,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이 나를 건드렸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지갑을 열었다. 용돈이 두둑하던 시절이 아니었다. 하지만 손은 이미 카드를 꺼내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 혼자 헛웃음이 나왔다. 씁쓸하고, 조금 억울하고, 그러면서도 묘하게 안도하는 감정. 그 복잡한 감정의 이름을 나는 한참 뒤에야 알았다. 그것은 체면이었다.

텅 빈 지갑 위에 놓인 영수증과 와인잔 — 체면과 소비의 아이러니

서머싯 모옴(William Somerset Maugham)의 단편소설 「오찬」(“The Luncheon”)을 다시 읽은 것은 우연이었다. 파리에서 가난한 무명작가로 살던 화자가 한 중년 여인에게 점심 초대를 받는 이야기다. 정확히는 초대가 아니다. 여인이 넌지시 고급 레스토랑을 제안했고, 청년 작가는 거절하지 못했다. “나는 점심엔 거의 아무것도 안 먹어요”라고 말하면서 그녀는 연어를 시키고, 캐비아를 시키고, 샴페인을 시키고, 아스파라거스를 시키고, 복숭아를 집어 들었다. 화자는 자신의 양고기 한 점을 앞에 두고 조용히 무너져 내린다.

모옴이 이 이야기를 웃음으로 포장했지만, 그 안에는 가볍지 않은 진실이 있다. 화자가 거절하지 못한 것은 돈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체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젊고 가난하고, 그리고 그 가난을 들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체면은 한국어에만 있는 단어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보편적인 인간의 감각이다. 영어로는 ‘face’라고도 하고, 사회학자 어빙 고프만(Erving Goffman)은 이것을 ‘인상 관리(impression management)’라고 불렀다. 우리는 타인의 눈앞에서 늘 어떤 ‘나’를 연출한다. 문제는 그 연출이 때로 지갑보다 크다는 것이다.

나는 가끔 인간관계가 식당의 온도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처음 들어갈 때는 따뜻하지만, 오래 앉아 있으면 슬슬 공기가 무거워진다. 처음에는 음식 이야기를 하고, 그다음에는 근황을 이야기하고, 조금 지나면 각자의 외로움이 테이블 위로 슬며시 올라온다. 그리고 다들 웃는다. 그 웃음 속에는 “우리 아직 괜찮지?” 같은 묘한 확인이 숨어 있다. 중년의 뒤풀이 자리가 유독 피곤한 것은 갈등이 있어서가 아니다. 서로 괜찮은 척하는 데 너무 많은 에너지를 쓰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체면은 왜 그렇게 집요하게 우리 지갑을 여는가. 이유는 셋이다.

파리풍 레스토랑의 흰 테이블보와 빈 접시 — 모옴의 오찬 장면 연상

우리는 가난보다 가난해 보이는 것을 더 두려워한다

모옴의 화자는 돈이 모자라면 소매치기를 당했다고 외치거나, 시계를 저당 잡히겠다는 터무니없는 상상까지 한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우아한 미소를 잃지 않는다. 이 처절한 연극은 타인에게 없어 보이고 싶지 않다는 일차적인 자존심에서 비롯된다. 가난 자체보다 가난이 들키는 순간을 더 두려워하는 것, 그것이 체면의 본질이다.

학회 뒤풀이에서 카드를 내밀던 그 손도 억울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 억울함보다 남의 눈이 먼저였다. 이 자리에서 내가 쪼잔해 보이면 안 된다. 이 사람들 앞에서 내가 가난해 보이면 안 된다. 그 생각이 손을 움직인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텅 빈 지갑을 들여다보면서도, 이상하게 후회보다 안도가 먼저 왔다. 적어도 그 자리에서 나는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아니,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믿고 싶었다.

심리학자들은 이것을 ‘자기제시 동기(self-presentation motivation)’라고 부른다. 타인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싶다는 욕구는 본능에 가깝다. 그 욕구가 사회적으로 굳어진 것이 바로 체면이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이것은 단순한 허영이 아니라 관계를 유지하는 일종의 언어로 기능해왔다. 체면을 세워주는 것, 체면을 살려주는 것 — 이것은 오랜 공동체 문화 속에서 서로를 다치지 않게 하는 완충재였다. 문제는 그 완충재의 가격이 때로 지갑 전체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그 가격은 더 올라간다. 젊을 때는 가난해도 가난한 척하지 않을 수 있다. 아직 미래가 있으니까. 하지만 중년이 되면 지금의 모습이 곧 전부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온다. 그래서 더 무리하고, 더 쪼들리고, 더 웃는다. 남의 눈을 의식하는 무게는 나이와 함께 조용히 불어난다.

체면은 자기 자신과의 약속이다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은 「자기신뢰」(“Self-Reliance”)에서 이렇게 썼다. 사람은 자신의 본성에 충실할 때 가장 강하다고. 그런데 역설적으로, 체면을 차리는 행위 안에도 자기 신뢰의 흔적이 있다. 나는 이 정도 되는 사람이다 — 라는 자기 정의. 그 정의를 스스로 무너뜨리고 싶지 않은 것이다. 에머슨이 말한 자기신뢰는 타인의 시선을 끊어내는 용기였지만, 우리가 일상에서 실천하는 자기신뢰는 종종 그 반대 방향으로 흐른다. 타인의 시선 앞에서 내가 정의한 ‘나’를 지키기 위해, 오히려 지갑을 여는 것이다.

문제는 그 자기 정의가 현실보다 앞설 때다. 지갑은 비어 있지만 자존심은 고급 레스토랑을 원한다. 그 간극을 메우는 것이 체면이고, 그 값은 고스란히 현실이 치른다. 모옴의 화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돈이 없다는 사실보다, 돈이 없는 사람으로 기억되는 것을 더 두려워했다. 자신이 스스로에게 부여한 ‘작가’라는 정체성이 무너지는 순간을 막기 위해 그는 캐비아 값을 치렀다.

체면은 때로 자존심의 다른 이름이고, 자존심은 때로 자기 자신을 향한 가장 완고한 거짓말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거짓말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나는 이 정도 되는 사람이다 — 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실제로 그 사람에 가까워지기도 한다. 체면이 자존심을 만들고, 자존심이 현실을 끌어올리는 순간이 분명히 존재한다. 문제는 그 순간이 생각보다 드물고, 지갑이 비는 순간은 생각보다 자주 온다는 것이다.

스타인벡(John Steinbeck)의 소설 속 인물들도 늘 그 경계 위에 서 있었다. 가진 것은 없지만 품위를 잃지 않으려는 사람들. 그들의 체면은 허영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자존이었다. 모옴의 화자가 캐비아 값을 치르면서 지킨 것도 결국 같은 것이었는지 모른다. 돈이 아니라, 자신이 믿고 싶었던 자기 자신의 모습.

우리는 그 순간이 영원히 기억될까봐 두렵다

모옴의 화자는 캐비아 값을 치르면서 아마도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이 여인이 나를 쪼잔한 사람으로 기억하면 어떡하지. 아니, 더 솔직하게는 — 이 순간이 내 인생에서 부끄러운 장면으로 남으면 어떡하지. 체면은 미래의 기억에 대한 불안이기도 하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보다 이 순간이 어떻게 기억될지를 더 걱정한다. 그래서 지갑이 비어 있어도 카드를 꺼낸다. 그래서 피곤해도 웃는다. 그래서 억울해도 먼저 손을 내민다.

그러나 모옴은 이야기의 끝에 조용한 복수를 준비해두었다. 이십 년이 지난 뒤, 극장에서 우연히 마주친 그 여인은 엄청난 거구가 되어 있었다. 화자는 그 한 장면으로 이십 년의 씁쓸함을 웃음으로 바꾼다. 체면의 대가는, 결국 시간이 치른다는 것이다.

나는 그 학회 뒤풀이의 기억을 오랫동안 씁쓸하게 떠올렸다. 얼마나 무리한 지출이었는지보다, 그 헛웃음이 더 오래 남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카드를 내밀면서 속으로는 이미 다음 달 생활을 계산하고 있던 그 이중성. 그달은 특히 빠듯했다. 매달 꼬박꼬박 태평양 건너로 송금을 해야 했고, 두 집 살림의 무게는 통장 잔액보다 훨씬 묵직했다. 그럼에도 손은 카드를 꺼냈다. 가족에게도, 동료에게도,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 나는 괜찮은 사람이어야 했다.

그것이 부끄러웠던 것인지, 아니면 그래야 했던 내 처지가 억울했던 것인지, 지금도 명확하지 않다. 다만 분명한 것은 하나다. 그날 밤 혼자 돌아오는 길, 텅 빈 지갑보다 더 허전한 것이 가슴 한켠에 있었다는 것.

혼자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 중년 남성 — 씁쓸한 뒤풀이 다음 날 아침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체면은 거짓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남으려는 인간의 방식이다. 타인의 시선 속에서, 관계 속에서,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싸움 속에서 우리는 체면이라는 갑옷을 입는다. 그 갑옷이 때로 너무 무겁고, 때로 지갑을 홀쭉하게 만들더라도. 어쩌면 체면이 없는 삶이란 더 가볍겠지만, 동시에 어딘가 허전할 것이다. 우리가 체면을 차리는 것은 내가 어떤 사람이고 싶은지에 대한 욕망이고, 그 욕망이 살아 있다는 증거다. 어쩌면 인간관계란 그 체면의 빚을 너무 무겁지 않게 들고 가기 위한 기술인지도 모른다.

모옴의 화자는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마침내 복수했다.” 하지만 그 복수는 이십 년을 기다려야 했다. 체면의 값은 그렇게 오래, 천천히 정산된다.

그날 내가 낸 그 돈이 아직도 기억나는 건, 금액 때문이 아니다. 그 순간 내가 나 자신에게 했던 거짓말 — 나는 괜찮아, 이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야 — 그 말이 아직도 어딘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그런 거짓말을 품고 산다. 그리고 그 거짓말이 때로는 우리를 지탱해준다.

당신에게도 그런 날이 있었는가. 지갑보다 체면이 먼저 움직인, 그 조용하고 씁쓸한 날이.

내부 링크 추천

  1. [Life & Humanities — 권위와 복종 관련 글] — “체면은 권위의 다른 이름이다”
  2. [Literary Travels in America — 에머슨 편] — “자기신뢰와 타인의 시선”
  3. [Steinbeck & Literature — 겨울의 불만 시리즈] — 이선 호울리의 체면과 몰락

외부 링크

  1. Wikipedia — William Somerset Maugham
  2. Britannica — Somerset Maugham 작가 소개
  3. 한국심리학회 관련 저널 — 한국인의 체면 심리학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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