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에 한 번, 소머리국밥집에 가는 이유
서울에 계신 어머니를 한 달에 한번 형제들과 함께 뵙고 다음날 오전에 전주로 돌아가는 날이면 나는 거의 같은 길을 달린다. 수유동을 떠나 동부간선도로를 지나고, 청담대교를 건너 경부고속도로에 오른다. 판교와 천안을 지나 남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어느 순간 어깨가 조금씩 내려간다. 계절마다 창밖 풍경은 조금씩 바뀐다. 봄에는 연둣빛 산등성이가, 여름에는 짙은 초록이, 가을에는 노랗게 마른 논이 스쳐 지나간다. 겨울이면 해가 짧아 어느새 헤드라이트를 켜야 할 만큼 어두워져 있다. 계절은 매번 다르지만 이 길을 달리는 마음만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천안 IC를 지나 목천 남천안 IC 근처에 맛집으로 소문난 소머리국밥집이 있다. 나는 고속도로 휴게소의 획일화된 음식을 먹기보다는 이 소머리 국밥집을 매달 항상 들린다. 붉은 벽돌 건물에 커다랗게 적힌 ‘한우 소머리국밥’이라는 글자. 특별히 세련되지도, 유명 관광지에 자리한 것도 아니다. 주차장은 늘 비슷한 자리가 꽉 차있고, 유리문을 밀고 들어서면 늘 비슷한 온도의 공기가 얼굴에 닿는다. 그러나 내게 이 집의 소머리국밥은 이제 음식 하나의 이름으로만 남아 있지 않다.
처음에는 맛있어서 갔다. 지금은 한 달을 건너기 위해 간다.

맛보다 먼저 떠오르는 것
사진 속 소머리국밥은 진하고 뽀얗다. 국물 위에는 후추와 잘게 썬 파가 떠 있고, 고기는 젓가락으로 들어 올리면 묵직하게 매달린다. 부드러운 살코기와 쫄깃한 부위가 한 점에 함께 붙어 있다. 곁들여 나오는 깍두기는 시원하고 아삭하며, 약간의 묵은지 맛이 나는 김치는 그야말로 환상이다. 밥 한 숟가락을 말아 김치와 먹으면 긴 운전으로 굳어 있던 몸이 천천히 풀린다. 아무리 더운 날씨라도 뜨거운 국물이 목으로 넘어가는 순간, 어깨와 목덜미에 남아 있던 긴장이 조금씩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진다.
이 집에 들어서기 전까지 나는 막 어머니의 집을 떠나온 사람이다. 연세가 든 어머니를 뵙는 일에는 기쁨과 안도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한 달 만에 다시 본 얼굴에서 지난달에는 보이지 않던 시간을 발견하기도 한다. 예전과 똑같이 말씀하시고 웃으셔도, 돌아서는 순간 마음 한쪽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무게가 남는다. 현관에서 손을 흔드시던 모습이 백미러에 비쳤다가 이내 사라진다. 그 잔상은 고속도로에 올라서도 한동안 지워지지 않는다.
젊을 때 부모의 집을 떠나는 길은 자유를 향한 길이었다. 중년 이후 부모의 집을 떠나는 길은 시간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길이 된다.
서울에서 전주로 내려오는 동안 나는 그 생각을 애써 밀어두는 편이다. 라디오를 듣고, 차선을 바꾸고, 휴게소 표지판을 바라본다. 운전은 생각을 잊게 해주는 가장 현실적인 노동이다. 눈은 도로에, 손은 핸들에, 마음은 잠시 유예된 채로 놓아둔다. 그러다 소머리국밥 앞에 앉으면 비로소 하루가 정지한다. 뜨거운 국물이 담긴 검은 뚝배기는 한동안 보글거린다. 나는 서둘러 숟가락을 넣지 않고 김이 조금 가라앉기를 기다린다. 그 짧은 기다림 속에서 방금 떠나온 어머니의 집과 앞으로 돌아갈 나의 집이 한자리에 겹친다. 두 개의 집 사이,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 이 몇 분이 나는 이상하게 편안하다.
그래서 이 소머리국밥은 배고픔을 채우는 음식이면서 동시에 헤어짐을 견디게 하는 음식이다. 어머니와 작별한 뒤 바로 일상으로 돌아가지 않고, 한 끼의 시간만큼 마음을 쉬게 하는 작은 완충지대다. 누군가에게는 이것이 그저 국밥 한 그릇에 불과하겠지만, 나에게는 하나의 계절에서 다음 계절로 건너가기 전에 거쳐야 하는 작은 관문 같은 것이다.

길은 장소를 만들고, 반복은 의미를 만든다
존 스타인벡의 『찰리와 함께한 여행』(Travels with Charley)을 읽으면 여행이 거창한 목적지보다 작은 장소들의 축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그는 미국을 횡단하면서 대도시의 명소만 바라보지 않았다. 길에서 만나는 사람, 간판, 식당, 낯선 대화와 예상하지 못한 침묵을 기록했다. 그가 이렇게 쓴 문장이 있다.
“We do not take a trip; a trip takes us.”
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여행이 우리를 데려간다.
스타인벡에게 여행은 지도를 통과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살던 세계를 새롭게 읽는 일이었다.
나의 서울과 전주 사이에도 거창한 모험은 없다. 한 달에 한 번 같은 고속도로를 달리고, 비슷한 시간에 같은 소머리국밥집에 들어간다. 주문도 거의 바뀌지 않는다. 밥과 국밥이 나오고, 김치와 깍두기와 몇 가지 반찬이 놓인다. 종업원의 얼굴도 낯익어졌고, 자리를 안내받지 않아도 늘 앉던 창가 자리로 자연스럽게 발이 향한다. 그런데 반복되는 길은 이상하게도 매번 같지 않다. 어머니의 얼굴도 지난달과 조금 다르고, 나의 마음도 지난달과 같지 않다. 날씨가 다르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뉴스가 다르고, 차창 밖의 빛이 다르다.
길은 반복되지만 사람은 반복되지 않는다.
우리는 흔히 반복을 지루함과 연결한다. 새로운 곳, 새로운 경험, 새로운 자극을 좇는 것이 삶을 풍요롭게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반복은 지루함보다 안도에 가깝다. 다시 갈 수 있는 길이 있고, 다시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며, 다시 들를 수 있는 식당이 있다는 것은 삶의 질서가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 달에 한 번 먹는 소머리국밥은 그 질서를 확인하는 표식이다.
이번 달에도 어머니를 뵈었다.
이번 달에도 무사히 이 길을 내려왔다.
이번 달에도 이 식당의 문은 열려 있었다.
이 평범한 세 문장이 어느 나이 이후에는 결코 평범하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조금 늦게 배운다. 언젠가 이 중 하나라도 당연하지 않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지금의 반복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길 위의 온정, 뜨거운 국물이 주는 안도
스타인벡의 또 다른 책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의 15장에는 문학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위 식당 장면이 등장한다. 66번 국도 변의 작은 다이너에 가난과 고단함에 지친 이주 노동자 가족이 들어온다. 주머니 사정이 딱한 그들에게 식당 주인과 요리사는 빵 한 덩이를 헐값에 내어주고, 아이들에게는 비싼 사탕을 단돈 1센트에 건넨다. 이 조용한 선의가 오가는 순간, 팍팍한 삶의 현장은 잠시 다른 얼굴을 갖는다. 스타인벡은 이 장면을 통해 낯선 이들 사이에서도 조건 없는 온기가 오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소머리국밥을 다들 좋아하는 이유도 아마 이처럼 뚝배기 가득 담긴 국물 속에 담긴 비언어적 다정함 때문일 것이다. 주방에서 몇 시간이고 뼈를 고아내는 수고로움은 손님에게 말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저 뜨거운 한 그릇으로 전달될 뿐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단편 「빅 투하티드 리버」(“Big Two-Hearted River”)를 읽다 보면 뜨거운 음식이 주는 육체적 안도감을 만나게 된다. 전쟁의 상흔을 지닌 주인공 닉 아담스는 숲속 깊은 곳에 캠프를 치르고, 스토브 위에 콩과 스파게티를 끓여 먹는다. 혀가 델 정도로 뜨거운 그 음식을 삼키며 그는 비로소 자신의 몸이 살아있음을, 거친 세상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음을 실감한다. 헤밍웨이는 이 장면을 아주 담담하게, 거의 절제된 문장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그 절제 속에 담긴 감정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장시간 핸들을 잡고 도로 위를 달려온 나에게도 소머리국밥은 닉 아담스의 뜨거운 수프와 비슷하다. 뚝배기에서 솟구치는 뜨거운 김을 쐬며 숟가락을 들 때, 비로소 팽팽하게 긴장했던 신경이 풀리고 몸 전체로 따뜻한 기운이 돈다. 국물 한 숟가락이 몸에 퍼지는 그 잠깐의 시간 동안, 나는 운전자도 아니고 아들도 아닌, 그저 한 그릇의 음식 앞에 앉은 사람이 된다.
한 그릇에 담긴 두 개의 집
나는 소머리국밥을 먹고 다시 전주로 향한다. 식당 문을 나서면 배는 든든하고, 마음은 들어올 때보다 조금 가벼워져 있다. 음식이 슬픔을 해결해준 것은 아니다. 어머니가 나이 드는 일도, 나 자신이 나이 들어가는 일도 달라지지 않는다. 다만 따뜻한 한 그릇은 삶의 속도를 잠시 늦춘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꾸 다음 장소로 이동한다. 부모의 집에서 자신의 집으로, 자녀를 돌보던 시간에서 자녀를 떠나보내는 시간으로, 젊음에서 중년으로, 다시 노년을 향해 간다. 이동하는 동안에는 우리가 어디쯤 와 있는지 알기 어렵다. 그래서 때로는 길가의 작은 식당이 필요하다. 멈추어 앉아 지금까지 온 길을 돌아보고, 아직 남아 있는 길을 바라볼 장소. 국물이 식기를 기다리는 그 몇 분이 실은 하루 중 가장 정직하게 나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내게 이 소머리국밥집은 서울의 어머니 집과 전주의 내 집 사이에 놓인 제3의 집인지도 모른다. 오래 머물지는 않지만, 두 집 사이에서 흔들리는 마음을 잠시 받아주는 곳이다. 집이 반드시 잠을 자는 장소일 필요는 없다. 어떤 집은 한 그릇의 국물로 우리를 맞아주고, 말없이 등을 밀어 다시 길로 보내준다.
2003년 캘리포니아 살리나스에서 스타인벡의 흔적을 좇던 시절, 나는 그의 문장들을 학술적으로 읽었다. 인물의 서사 구조를, 상징을, 시대적 배경을 분석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정작 그 문장들이 몸으로 이해되기 시작한 것은 20여 년이 지나 이 국도 위에서였다. 논문으로 쓸 수 없는 종류의 이해가 있다. 반복되는 길, 반복되는 국밥, 반복되는 그리움 속에서만 열리는 문장의 결이 있다는 것을, 나는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학자로서 평생 텍스트를 읽어왔지만, 정작 가장 깊은 문장은 강의실이 아니라 국도 위에서 완성되었다.

다시 갈 수 있다는 것
음식에 대한 기억은 맛보다 오래간다. 어떤 음식은 함께 먹었던 사람을 기억하게 하고, 어떤 음식은 한 시절의 가난이나 기쁨을 불러낸다. 또 어떤 음식은 특정한 길과 연결된다. 그 길을 지나기만 해도 입안에 먼저 맛이 떠오르고, 아직 식당에 도착하지 않았는데도 마음이 조금 놓인다.
내게 소머리국밥은 어머니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의 맛이다.
언젠가는 이 길의 의미도 달라질 것이다. 한 달에 한 번이라는 약속이 언제까지나 계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어머니의 집도, 내가 달리는 차도, 늘 그 자리에 있을 것 같은 소머리국밥집도 시간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다음 달에도 가능하면 이곳에 들를 것이다. 맛있기 때문이고, 배가 고프기 때문이며, 무엇보다 아직 같은 길을 다시 달릴 수 있기 때문이다.
뚝배기에서 올라오는 김 너머로 지난달의 내가 보이고, 다음 달의 내가 희미하게 기다리고 있다. 어쩌면 우리가 같은 식당을 다시 찾는 까닭은 같은 맛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난번의 나와 이번의 내가 아직 하나의 길 위에 이어져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확인이 가능한 한, 나는 이 길을 계속 달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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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 추천
The National Steinbeck Center (steinbeck.org)
E. 헤밍웨이의 “Big Two-Hearted River”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
존 스타인벡의 『찰리와 함께한 여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