낚싯대 다섯 개는 왜 버릴 수 없을까 — 소유욕이 사람을 무겁게 만드는 4가지 방식
In the first place, it makes them heavy.
첫째로, 소유는 사람을 무겁게 만든다. 영국 작가 E.M. 포스터가 에세이 「나의 숲」(“My Wood”)의 첫머리에 적은 문장이다. 그는 소설 『인도로 가는 길』(A Passage to India)의 인세로 작은 숲을 사들이고 나서, 자신에게 일어난 이상한 심리적 변화를 이 짧은 에세이에 담았다. 나는 이 문장을 거실 한쪽 구석에 나란히 세워놓은 루어 낚싯대 수십 개 앞에서 곱씹는다. 일 년에 몇 번 쓸까 말까 하면서도 좀처럼 버리지 못하는 그것들. 서랍을 열면 낚시종류와 크기별로 정리된 릴이 수십여 개, 그 옆에는 오래전에 산 낚시 가방과 예비 부품들까지. 누가 봐도 과한 살림인데, 그중 하나라도 처분하려고 하면 이상하게 손이 멈춘다. 이게 바로 소유욕이라는 것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포스터는 숲을 갖게 되면서 자신에게 벌어진 변화를 아주 솔직하게 기록했다. 숲에 새 한 마리가 날아들면 저도 모르게 “내 새인가”라고 생각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소스라친 것이다. 두꺼비 한 마리, 뱀 한 마리가 눈에 띌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렇게 썼다. “Property does have this effect. Property produces men of weight.” 소유는 사람을 무겁게 만든다는 이 통찰을, 그는 결코 남에게서 발견하지 않았다. 자기 자신에게서 발견했다. 그 정직함이야말로 이 짧은 에세이를 단순한 소유 비판이 아니라, 소유 앞에서 달라지는 인간을 관찰하는 글로 만든다. 포스터는 도덕적으로 훈계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얼마나 빨리, 얼마나 자연스럽게 소유욕에 물드는지를 웃으며 고백할 뿐이다. 그 웃음 속에 진짜 통찰이 있다.
소유욕이 사람에게 남기는 네 가지 흔적

포스터가 자신의 숲에서 발견한 소유욕의 속성은 크게 네 가지로 읽을 수 있다. 첫째는 물리적이고 정신적인 무거움이다. 둘째는 끊임없이 더 큰 것을 원하게 만드는 욕망의 증식이다. 셋째는 그것을 남에게 은근히 드러내고 싶어 하는 과시욕이고, 넷째는 타인의 침범을 막기 위해 울타리를 치고 싶어 하는 배타성이다.
내 서재와 낚시 장비를 돌아보면 이 네 가지가 놀라울 정도로 정확히 들어맞는다. 책과 낚싯대는 무거움을 만들고, 등급표를 들여다보며 더 좋은 일본산 릴에 눈이 가는 마음은 욕망의 증식이다. 잘 관리된 장비를 남에게 슬쩍 보여주고 싶은 마음은 과시욕이며, 내 서재를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게 하려는 태도는 배타성이다. 흥미로운 건, 이 네 가지가 따로따로 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소유욕은 언제나 이 네 가지를 한 묶음으로 데려온다. 무거움을 느끼면서도 더 원하고, 더 원하면서도 남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고, 보여주고 싶어 하면서도 정작 함부로 만지는 건 싫어한다. 이 모순된 감정들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이야말로 소유욕의 가장 인간적인 얼굴이다.
포스터는 이 네 가지 중에서도 특히 배타성을 가장 불편하게 여겼다. 자신의 숲에 울타리를 치고 싶어 하는 마음, 남이 자신의 나무 그늘 아래 앉는 것조차 거슬리는 마음. 그는 이 감정이 자신을 작게 만든다는 것을 알면서도 떨쳐내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나 역시 비슷한 경험이 있다. 서재의 책 배열을 누군가 흐트러뜨리면, 별것 아닌 일에도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진다. 낚싯대의 순서가 조금만 바뀌어도 신경이 쓰인다. 이것이 정말 물건을 아끼는 마음일까, 아니면 그저 영역을 지키려는 본능일까.
책이 만든 무게
30년 넘게 강의를 하고 논문을 쓰면서 쌓인 책은 이제 서재 두 벽을 채우고도 남는다. 스타인벡 관련 자료만 해도 상당한 분량이다.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 관련 비평서, 학술지들과 그 별쇄본들, 오래전 절판된 초판본까지, 하나하나가 나름의 사연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이 책들이 나를 편하게 해주기보다 은근히 짓누른다는 느낌을 받았다. 새 책이 들어올 자리를 만들기 위해 기존 책을 어디로 옮길지 고민하는 시간, 이사할 때마다 몇 박스씩 책을 나르며 느끼는 부담. 지식을 쌓는다고 생각했던 행위가, 어느 순간부터 물리적인 소유욕의 다른 이름이 되어 있었다.
책을 소유했다고 해서 그 안의 지혜가 온전히 내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포스터가 숲을 가졌다고 해서 그 숲의 본질을 가진 것이 아니었듯이. 그는 에세이 후반부에서 이렇게 말한다. 숲을 소유한다고 해서 나무 한 그루, 새 한 마리의 본질을 소유하는 것은 아니라고. 책도 마찬가지다. 서가에 꽂혀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책의 통찰이 내 것이 되지는 않는다. 책은 읽혀질 때, 그것도 여러 번 곱씹어 읽혀질 때 비로소 그 가치가 빛나는데, 서재에 가두어두고 나만의 영토로 묶어두려 할 때 소유욕은 오히려 최고조에 달한다. 나는 가끔 서가를 바라보며 이 책들 중 몇 권을 최근 몇 년 사이에 다시 펼쳤는지 헤아려본다. 부끄럽게도 많지 않다. 그런데도 버릴 생각은 하지 않는다. 이 모순이야말로 소유욕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자리일 것이다.

릴을 조이며 깨닫는 소유욕의 사다리
주말 오후, 릴들을 꺼내 바다낚시로 묻게된 소금기를 세척하고 말리고 기름칠을 한다. 손끝으로 나사를 조이고 스풀을 돌려보는 이 시간은 이상하게 평온하다. 그런데 문득 생각한다. 나는 이 릴들을 정말 낚시를 위해 손질하는가, 아니면 소유했다는 감각을 확인하기 위해 손질하는가.
며칠 전에도 시마노와 다이와의 릴 등급표를 한참 들여다봤다. 넥사브에서 시작해 나스키, 미라벨, 스트라딕을 거쳐 결국 스텔라로 이어지는 화살표. 다이와 쪽도 크레스트에서 출발해 세르테이트, 루비아스를 지나 에어리티까지 오르는 똑같은 사다리다. 지금 쓰는 릴이 딱히 부족해서가 아니다. 그런데도 화살표를 따라 위로 시선이 올라가는 걸 막을 수가 없다. NS 로드의 낚싯대 라인업을 훑어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벽에 걸린 낚시대로는 못 잡는 어종은 사실 없는데도, 민물 쏘가리 루어대와 인쇼어 루어대 사이에서 “이건 또 다른 손맛이겠지” 하는 생각이 슬그머니 고개를 든다.

포스터가 숲을 소유하면서 겪은 변화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는 숲이 생기자 곧 “이 숲이 더 크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고백한다. 처음엔 작은 숲 하나로 충분했는데, 소유한 순간부터 그 경계 너머의 땅이 눈에 밟히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소유는 만족이 아니라 갈증을 낳는다는 것. 수백만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릴 등급표의 화살표는 그 갈증을 아주 친절하게, 단계별로 시각화해서 보여준다. 넥사브를 쓰다 보면 나스키가, 나스키를 쓰다 보면 스트라딕이 눈에 들어오도록 설계된 이 사다리는 사실 소유욕이 작동하는 방식 그 자체다. 필요해서 갖게 된 것과, 갖고 싶어서 필요하다고 믿게 된 것 사이의 경계는 이 사다리 위에서 유난히 흐려진다.
재미있는 건, 이 화살표가 나만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등급표는 애초에 그렇게 설계된 것이다. 한 단계를 소유하는 순간 다음 단계가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오도록, 그 사다리는 끝없이 위를 향해 뻗어 있다. 소유욕이 개인의 나약함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우리를 둘러싼 구조 자체가 부추기는 감정이기도 하다. 포스터의 숲에는 화살표가 없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그런 사다리가 자라고 있었다. 나의 릴 서랍 속에도 같은 사다리가 조용히 놓여 있다.
비움과 채움 사이에서 발견하는 것
서랍 하나를 열면 더 이상 쓰지 않는 옛날 휴대폰, 고장 난 이어폰, 어디에 쓰는지도 잊어버린 케이블들이 뒤엉켜 있다. 새 기기가 나올 때마다 사들이고, 옛것은 버리지 못한 채 쌓아온 흔적이다. 흥미로운 건, 이 물건들을 쓰는 시간보다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서 오는 안도감이 더 크다는 점이다. 물건이 주는 실용적 가치보다, 그것이 “내 것”이라는 사실이 주는 심리적 무게가 더 큰 것이다. 서랍을 정리하려고 마음먹을 때마다, 손에 쥔 물건 하나하나에 얽힌 사소한 기억이 발목을 잡는다. 이 이어폰은 어느 여행 중에 샀던 것이고, 저 케이블은 어떤 기기와 짝을 이루었던 것이고. 기억이 물건에 스며 있다고 믿는 순간, 물건을 버리는 일은 기억을 버리는 일처럼 느껴진다.
포스터는 「나의 숲」의 끝자락에서 성서의 한 구절을 끌어온다.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는 그 구절을, 그는 재산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마음의 부피 문제로 읽는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그 짐을 지고 좁은 문을 통과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수십대의 루어 낚싯대들과 릴들, 등급표 맨 꼭대기를 향해 슬그머니 올라가는 시선, 그리고 책장 두 벽 분량의 책들. 이 모든 것을 안고 좁은 문을 통과하려면 나는 얼마나 애를 먹을까. 포스터가 말한 낙타는 아마도 자기 등에 짐을 진 채로 좁은 문 앞에 선 우리 모두의 모습일 것이다. 짐을 내려놓지 않으면 통과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어느 짐 하나 선뜻 내려놓지 못하는 마음.
어쩌면 소유욕의 반대말은 가난이 아니라 놓아줌인지도 모른다. 갖지 못해서 없는 것과, 가질 수 있지만 더 이상 갖지 않기로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기 때문이다. 전자는 결핍이지만 후자는 선택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대개 나이가 들면서, 혹은 물건을 충분히 오래 소유해본 뒤에야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 같다. 젊었을 때는 갖지 못한 것에 대한 갈증으로 소유욕이 자란다면, 세월이 흐른 뒤에는 이미 가진 것의 무게를 깨달으며 오히려 놓아주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고 오늘 당장 낚싯대를 다 내다 버릴 생각은 없다. 다만 이제는 등급표의 화살표를 볼 때마다, 서랍을 열 때마다 한 번씩 묻게 된다. 이건 내가 가진 것인가, 아니면 나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

포스터의 숲도, 나의 낚싯대와 릴도 결국 크기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이 우리 마음에 얼마나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그 무게를 가늠해보는 일. 소유욕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의 욕망이 짧은 에세이 한 편으로 그렇게 쉽게 사라진다면 세상은 훨씬 단순했을 것이다. 포스터 역시 에세이 끝까지 자신의 소유욕을 완전히 극복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그것을 정직하게 들여다보았을 뿐이다. 어쩌면 그 정직함이야말로 소유욕과 함께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다만 물건을 하나 더 갖고 싶어질 때, 그 전에 잠깐 내 마음을 먼저 들여다볼 수는 있을 것 같다. 이 갈증이 정말 필요에서 오는 것인지, 아니면 사다리를 오르고 싶은 마음에서 오는 것인지. 답을 찾지 못해도 괜찮다. 질문을 던지는 것만으로도, 소유물이 나를 조용히 무겁게 만드는 그 과정에 한 번쯤 제동을 걸 수 있을 테니까. 그것이 소유욕과 함께 살아가는 유일하게 정직한 방법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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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 추천:
E.M. 포스터 협회(E.M. Forster Society) 공식 페이지
브리태니커(Encyclopaedia Britannica)의 포스터 작가 소개
스피닝 릴 등급 정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