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밍웨이 문학기행 4곳, 『노인과 바다』의 진짜 바다는 어디였을까
헤밍웨이 문학기행을 떠올릴 때 사람들은 대개 파리의 카페나 팜플로나의 투우장을 먼저 그린다. 하지만 그가 노벨문학상을 안겨준 문장을 완성한 곳은 바다였다. 이 글에서는 키웨스트에서 쿠바 코히마르, 그리고 걸프스트림까지 이어지는 헤밍웨이 문학기행 코스를 따라가 본다.
키웨스트, 낚시와 문장이 함께 자란 곳

헤밍웨이 문학기행을 계획한다면 가장 먼저 들러야 할 곳이 키웨스트다. 헤밍웨이는 1928년 아바나를 거쳐 플로리다 최남단 섬 키웨스트에 도착했고, 1931년부터는 Whitehead Street의 집에 정착했다. 오늘날 이 집은 Ernest Hemingway Home & Museum으로 남아 있으며, 헤밍웨이 문학기행 명소 중 가장 많은 방문객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그는 『무기여 잘 있거라』(A Farewell to Arms)를 완성했지만, 정작 『노인과 바다』(The Old Man and the Sea)를 써낸 곳은 쿠바 아바나 근교의 저택 핀카 비히아(Finca Vigía)였다. 키웨스트는 그를 바다로 이끈 출발점, 쿠바는 그 바다가 문장으로 응결된 종착지였다는 점에서 헤밍웨이 문학기행은 처음부터 두 나라에 걸친 여정이 된다.
키웨스트 시절 헤밍웨이는 대형 어종을 낚는 빅게임 낚시에 깊이 빠져들었다. 친구들과 함께 드라이 토르투가스(Dry Tortugas)와 비미니(Bimini)를 거쳐 쿠바까지 배를 몰고 나가 참치와 청새치를 쫓았다. 1934년 마련한 약 38피트짜리 배 필라(Pilar)호에는 큰 물고기를 끌어올리기 위한 장치와 장거리 항해를 위한 대형 연료탱크까지 갖춰져 있었다. 헤밍웨이 문학기행에서 이 배의 흔적을 짚어보면 『노인과 바다』의 낚시 장면은 다르게 읽힌다. 그가 상상만으로 낚시를 쓴 작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낚시는 물고기를 잡는 시간보다 기다리는 시간이 훨씬 길다. 줄 끝에 무엇이 있는지 보이지 않는 채 손끝의 미세한 힘만으로 버티는 시간, 소설의 긴 침묵과 반복은 그 기다림의 리듬을 닮았다. 헤밍웨이 특유의 빙산이론(Iceberg Theory) 역시 이 바다의 감각과 묘하게 겹친다. 말하지 않은 것이 말한 것보다 더 크고, 물 위에 보이는 것보다 물 아래 감춰진 것이 훨씬 크다는 것이다.
코히마르, 아직 밟지 못한 산티아고의 해안

헤밍웨이 문학기행을 준비하며 가장 마음에 걸리는 장소가 코히마르다. 산티아고의 모델로 흔히 거론되는 인물은 필라호를 몰던 실제 뱃사공 그레고리오 푸엔테스(Gregorio Fuentes)다. 코히마르는 아바나 동쪽의 작은 어촌으로, 필라호가 정박했던 곳이자 『노인과 바다』의 지리적 원형이며, 헤밍웨이 문학기행에서 가장 상징적인 장소로 꼽힌다. 다만 필자는 아직 그 해안을 직접 걷지 못했다. 살리나스의 스타인벡 생가와 몬테레이 캐너리 로우는 2003년 연구년 동안 발로 밟았지만, 코히마르의 모래는 여전히 텍스트로만 밟고 있다. 이 간극을 굳이 감추지 않으려 한다. 헤밍웨이 문학기행이란 결국 발과 텍스트 사이의 거리를 인정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소설 속 산티아고는 84일 동안 물고기를 잡지 못한 늙은 어부다. 85일째 되는 날 그는 홀로 먼바다로 나간다. 국내 학계의 한 심층생태학 연구는 산티아고와 청새치의 관계가 세 단계를 거쳐 변화한다고 짚는다. 처음엔 청새치를 낚싯바늘에 걸어 굴복시켜야 할 대상, 자신의 불운을 씻어줄 트로피로 여긴다. 이어 산티아고는 청새치와 말을 걸듯 소통하는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가며, 마침내는 청새치를 자기 존재의 일부처럼 느끼는 세 번째 단계에 이른다. 처음엔 단순하다. 어부는 물고기를 잡으러 간다. 그러나 점점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잡아야 할 청새치가 경쟁자가 되고, 경쟁자는 마침내 형제가 된다. 산티아고는 청새치를 향해 말한다.
“I love you and respect you very much. But I will kill you dead before this day ends.”
나는 너를 정말 사랑하고 존경한다. 하지만 오늘이 지나기 전에 너를 반드시 죽이고 말겠다.
여기서 『노인과 바다』는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는 이야기에서, 인간과 자연의 경계가 흔들리는 이야기로 바뀌기 시작한다. 헤밍웨이 문학기행이 코히마르에서 던지는 질문도 바로 이것이다. 인간은 정말 자연을 정복할 수 있는가.
걸프스트림, 인간이 작아지는 자리

헤밍웨이 문학기행의 다음 목적지는 육지가 사라지는 곳, 걸프스트림이다. 코히마르의 해안을 떠나 멀리 나가면 배 한 척, 낚싯줄 하나, 사람 한 명, 그리고 바다만 남는다. 산티아고는 바다를 스페인어로 ‘라 마르'(la mar)라 부르는데, 이는 사람들이 바다를 사랑할 때 쓰는 여성형 표현이다. 그에게 바다는 때로 은혜를 베풀고 때로 잔혹한 시련을 내리는 생명체 그 자체다. 산티아고는 날치를 친구로 여기고 거북과 돌고래를 관찰하며 청새치의 힘에 감탄한다. 마침내 그는 이렇게 되뇐다.
“Man is not much beside the great birds and beasts.”
위대한 새들과 짐승들 곁에서 인간은 그다지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
청새치가 상어에게 훼손되었을 때 산티아고는 마치 자신이 상처 입은 것처럼 느낀다.
“He did not like to look at the fish anymore since he had been mutilated. When the fish had been hit it was as though he himself were hit.”
그는 물고기가 훼손된 뒤에는 더 이상 그것을 바라보고 싶지 않았다. 물고기가 공격당했을 때 마치 자신이 공격당한 것처럼 느껴졌다.
인간과 자연 사이에 그어졌던 선이 여기서 흐려진다. 이 소설을 둘러싼 생태비평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한쪽은 이 작품을 심층생태학의 순수한 구현으로 보고 산티아고의 귀환을 생태학적 승리로 읽는다. 다른 한쪽은 산티아고의 반생태학적 의식, 즉 여전히 남아 있는 인간중심적 태도를 지적하며 헤밍웨이의 생태학적 사고가 애매모호하다고 본다. 이 두 극단 사이에서 산티아고의 변화를 인간중심적 자연관에서 조화와 균형을 중시하는 생태적 자연관으로의 이행으로 읽어내는 시각도 있다. 헤밍웨이 문학기행에서 걸프스트림을 상상해볼 때 얻게 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그가 얻은 것은 거대한 청새치가 아니라, 인간 역시 자연이라는 거대한 관계망 안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에 가깝다.
이 감정선의 기복을 계량적으로 추적한 또 다른 연구도 있다. 서사 단계별 정서단어 출현 빈도를 분석한 결과, 발단과 결말에서는 긍정 정서의 비중이 가장 높았고 상어와의 사투가 벌어지는 절정부에서는 부정 정서가 최고조에 달했다가, 결말에 이르러서는 부정 어휘가 완전히 사라지고 fine, great, well 같은 긍정적 어휘만 남았다. 말을 아낄수록 감정이 오히려 선명해진다는 헤밍웨이 특유의 빙산이론이 수치로 확인된 셈이다.
이상한 바다, 언어보다 큰 자연
산티아고는 바다를 오래 경험한 노련한 어부다. 그런데도 작품에는 이상하다(strange)는 단어가 열일곱 차례나 반복된다. 산티아고 자신에게도, 청새치에게도, 심지어 상어에게도 이 단어가 붙는다. 이것은 단순한 형용사가 아니라 인간의 언어가 자연을 완전히 포착하지 못한다는 고백에 가깝다. 자연은 우리의 서술에 순응하지 않으며, 언어로 완전히 정의되기를 끊임없이 거부한다. 산티아고는 비행기를 떠올리며 이렇게 생각한다.
“I wonder what the sea looks like from that height?”
저 높이에서는 바다가 어떻게 보일까?
높은 곳에서는 바다 전체를 볼 수 있지만 바닷속에서 벌어지는 일은 볼 수 없다. 반대로 작은 배 위의 산티아고는 바다를 온몸으로 경험하지만 그 전체를 조망할 수 없다. 인간이 자연을 이해하는 방식도 이와 다르지 않다. 관찰하고 이름 붙이고 설명하지만, 언제나 설명 밖에 남는 무언가가 있다. 헤밍웨이 문학기행을 통해 이 바다를 따라가 보면, 이 소설의 바다가 배경이 아니라 인간의 인식보다 더 큰 존재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뼈만 남은 청새치, 다시 묻는 승리
산티아고는 결국 돌아오지만 그가 가져온 것은 상어에게 뜯기고 남은 뼈뿐이다. 그래서 가장 유명한 문장도 다시 읽어야 한다.
“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어도 패배하지는 않는다.
흔히 이 문장은 불굴의 인간 정신을 선언하는 말로 읽힌다. 틀린 해석은 아니다. 하지만 헤밍웨이 문학기행을 통해 이 문장을 바다라는 장소 안에서 다시 생각하면 다른 질문이 따라온다. 누가 누구에게 승리했는가. 산티아고가 청새치를 이겼는가, 상어가 산티아고를 이겼는가, 혹은 바다가 인간을 이겼는가. 어쩌면 어느 것도 아닐지 모른다. 산티아고의 진짜 변화는 자연을 이겼다는 데 있지 않고, 자신이 자연과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몸으로 경험했다는 데 있다.
수면 위로 드러난 문장은 전체 빙산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 아래 가라앉은 것은 타자를 억압하고 소유함으로써 얻는 승리와, 모든 생명과 깊게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는 삶 사이의 오래된 질문이다.
1952년 발표된 이 작품은 이듬해 퓰리처상을, 1954년에는 노벨문학상을 안겼다. 헤밍웨이 자신은 어떠한 상징도 없다고, 바다는 바다이고 노인은 노인일 뿐이라고 일축했지만, 그 단호한 부정 자체가 역설적으로 이 작품의 해석 가능성을 넓혀왔다.
키웨스트의 부두와 코히마르의 선착장을 잇는 헤밍웨이 문학기행은, 인간이 자연 앞에서 얼마나 겸손해질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여정이다. 헤밍웨이 문학기행을 아직 떠나지 못한 독자라면, 적어도 문장 속에서나마 그 파도 소리를 따라가 보시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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