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자 메이 올컷의 『작은 아씨들』문학기행, 콩코드에서 만난 5가지 풍경
콩코드(Concord)의 가을 아침, 렉싱턴 로드(Lexington Road)를 따라 걷다 보면 단풍 사이로 갈색 판자벽의 낡은 이층집 한 채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바로 루이자 메이 올컷(Louisa May Alcott)이 『작은 아씨들』(Little Women)을 써 내려간 집, 오처드 하우스(Orchard House)입니다. 소설 속 마치(March) 가의 네 자매가 금방이라도 현관문을 열고 뛰어나올 것만 같습니다. 이 글에서는 작은 아씨들의 배경지 콩코드를 천천히 걸으며, 한 소녀가 자기 언어를 갖게 된 다섯 풍경을 차례로 따라가 봅니다.

『작은 아씨들』이 태어난 집, 렉싱턴 로드 399번지
오처드 하우스는 콩코드 렉싱턴 로드 399번지에 서 있습니다. 17세기 중반에 지어진 이 오래된 집을 올컷 가족은 1858년부터 약 20년간 보금자리로 삼았고, 1868년 올컷은 바로 이 집에서 작은 아씨들을 완성했습니다. 더 흥미로운 점은 소설의 무대 역시 이 집이라는 사실입니다. 마치 가의 거실과 다락방, 자매들이 연극을 올리던 공간이 모두 실제 이 집의 방들에서 나왔습니다. 지금도 집 안 가구의 약 80퍼센트가 올컷 가족이 실제로 쓰던 물건이라 하니, 이곳은 ‘작가의 집’이라기보다 소설이 그대로 굳어버린 표본실에 가깝습니다.
보스턴에서 교외선을 타고 서쪽으로 한 시간 남짓 달리면 짙은 수풀과 고풍스러운 목조 건물이 반기는 콩코드에 닿습니다. ‘오처드(과수원)’라는 이름 그대로, 집 둘레에는 작고 노쇠한 사과나무들이 정원을 호위하듯 서서 바람이 불 때마다 거친 가지로 서글픈 소리를 냅니다. 필자는 이 앞에서, 오래전 스타인벡의 고향 캘리포니아 살리나스(Salinas)를 걸으며 30년간 텍스트로만 읽어 온 공간을 처음 두 발로 밟았을 때의 전율을 떠올렸습니다. 낡은 가옥의 문손잡이를 잡았을 때 전해진 나무의 서늘한 감촉, 마루의 삐걱거리는 소리는 활자 속 마치 가의 세계로 단숨에 데려가기에 충분했습니다. 캐나다와 북미 대륙을 오가며 살아온 사람으로서 말하자면, 뉴잉글랜드의 낮은 하늘과 차가운 가을빛은 소설의 첫 장면을 곧장 불러냅니다. 작은 아씨들 문학기행의 출발점으로 이보다 적절한 자리는 없습니다.
아버지가 만든 반달 책상, 소녀 예술가의 좌표
집 안에서 발길이 가장 오래 머무는 곳은 올컷의 침실입니다. 두 창문 사이에 붙은 반달 모양의 작은 나무 책상 하나. 아버지 브론슨 올컷(Bronson Alcott)이 글쓰기를 좋아하는 딸을 위해 직접 만들어 준 것으로, 올컷은 바로 이 책상에서 작은 아씨들을 써 내려갔습니다. 여성 작가가 환영받지 못하던 시절, 한 평 남짓한 이 자리에서 훗날 50개 언어 이상으로 읽히게 될 소설이 태어난 셈입니다.
소설의 첫 장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Christmas won’t be Christmas without any presents,” grumbled Jo, lying on the rug.(“선물 없는 크리스마스는 크리스마스가 아니지.” 융단 위에 누운 조가 투덜거렸다.) 이 도입부는 마치 가의 물질적 궁핍과 동시에 그것을 헤쳐 갈 네 자매의 역동성을 단번에 보여줍니다. 조가 다락방에서 마음에 안 드는 원고를 던지고 다시 쓰기를 반복하던 장면, 자매들이 직접 극본을 쓰고 무대를 꾸며 올린 크리스마스 연극, 손수 만든 가족 신문 픽윅 포트폴리오(Pickwick Portfolio)를 돌려 읽는 픽윅 클럽(Pickwick Club)이 모두 이 집의 공기 속에서 나왔습니다. 실제로 오처드 하우스에는 자매들이 연극에 쓰던 손바느질 의상까지 남아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를 짚고 싶습니다. 올컷이 그린 조(Jo)는 고독한 천재가 아닙니다. “Jo, who revelled in pens and ink, was the editor.”(펜과 잉크에 흠뻑 빠진 조가 편집장이었다.) 조의 글쓰기는 늘 가족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서로의 평을 듣고 받아들이며 자랍니다. 그것은 한 개인의 재능이 아니라 가정 안에서 길러진 읽고 쓰는 능력, 곧 가정 내 리터러시의 산물입니다. 작품의 배경이 남북전쟁(Civil War, 1861-65)이라는 점도 결정적입니다. 아버지는 전장에 나가 편지로만 존재하고, 이웃집 로리(Laurie)는 음악을 좋아하는 ‘소년’일 뿐입니다. 남성이 비운 자리, 그 공백 속에서 아직 ‘여성’도 ‘남성’도 아닌 ‘소녀’ 예술가가 탄생합니다. 이 반달 책상은 그 탄생의 정확한 좌표입니다.

작은 아씨들이 ‘예술가 소설’인 이유, 죠 마치의 펜
흔히 『작은 아씨들』은 따뜻한 가정 소설로 읽히지만, 한 발 더 들어가 보면 한 소녀가 작가로 태어나는 이야기에 가깝습니다. 주인공 죠 마치(Jo March)는 예법보다 펜과 잉크를 사랑하는 책벌레이자 선머슴(tomboy)으로, 전쟁터에 나간 아버지를 대신해 스스로를 집안의 “남자”로 여기는 인물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죠의 글쓰기가 고독한 천재의 작업이 아니라 가족 공동체 안에서 자란다는 점입니다. 네 자매는 죠가 쓴 크리스마스 가족극을 함께 올리고, 디킨스(Charles Dickens)의 신사 클럽을 흉내 낸 픽윅 클럽(Pickwick Club)을 만들어 가족 신문까지 펴냅니다. “Jo, who revelled in pens and ink, was the editor.”(펜과 잉크에 흠뻑 빠진 죠가 편집장이었다.) 그 절정은 신문에 실린 자기 소설을 자매들에게 읽어 주던 죠가 끝내 정체를 밝히는 순간입니다. “Your sister!”(여러분들의 자매가 썼어!) 독자가 곧 작가가 되고, 개인의 창작이 가족의 환호 속에서 공동의 사건으로 바뀌는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죠.
그러나 이 소녀 예술가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베어 교수(Professor Bhaer)와 가까워지면서 죠는 자신이 즐겨 쓰던 센세이션 소설을 부끄러워하고 어느새 펜을 내려놓습니다. ‘소녀’에서 ‘숙녀’로 성장하는 바로 그 순간, 자유롭던 예술가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작품의 배경이 남북전쟁(Civil War, 1861-65)이라는 점을 떠올리면 의미는 한층 또렷해집니다. 아버지는 편지로만 존재하고 음악을 좋아하는 ‘소년’ 로리만 남은 집, 남성이 비워 둔 그 공백 속에서 아직 ‘여성’도 ‘남성’도 아닌 ‘소녀’가 비로소 펜을 들 수 있었습니다. 작은 아씨들이 단순한 가족 소설을 넘어 한 편의 ‘예술가 소설’로 읽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작은 아씨들의 공간과 현실, 그 간극이 주는 전율
거실과 침실을 구석구석 살피다 보면, 문학 속 공간과 실제 장소 사이의 묘한 간극과 일치에서 오는 감동에 사로잡힙니다. 셋째 베스(Beth)가 연주하던 낡은 피아노가 거실 한구석에 호젓하게 놓여 있고, 벽에는 막내 에이미(Amy)가 그렸다는 스케치가 빛바랜 채 남아 있습니다. 막내가 로리를 두고 외눈박이 괴물 사이클롭스(Cyclops)라 잘못 부르자 조가 “반인반마 켄타우로스(Centaur)의 잘못이겠지”라며 웃어대던 위트 있는 장면이 이 방의 질감 위로 겹쳐 흐릅니다.
작은 아씨들은 흔히 따뜻한 가정 소설로만 읽히지만, 문학사적으로 보면 대단히 급진적인 여성 예술가의 이야기입니다. 올컷은 조를 통해 당시 여성에게 강요되던 감상적이고 수동적인 양식을 거부하고, 거칠고 생생한 고딕·센세이션 소설을 써서 가문의 생계를 돕는 주체적 작가를 그렸습니다. 자기 원고가 신문에 활자화되어 나온 순간, 조는 “너희들의 자매가 이 글을 썼어!”라고 외칩니다. 구전의 놀이로 자라난 글쓰기가 인쇄 문화와 결합하는 순간이자, 개인의 창작이 가족의 환호 속에서 예술로 승화하는 가장 아름다운 대목입니다.
오처드 하우스에서 멀지 않은 콩코드 강가에는 또 다른 장면이 깃들어 있습니다. 조와 로리가 소나무 숲에서 저마다의 공중누각(Castle in the air), 곧 미래의 꿈을 이야기하던 자리입니다. 음악가가 되고 싶던 로리, 화가가 되어 로마로 가고 싶던 에이미, 그리고 무엇보다 위대한 책을 써서 독립적인 영혼으로 살고 싶다던 조의 목소리가 강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듯합니다. 텍스트로만 읽던 그 대화가 실제 물길 앞에서 입체로 살아나는 순간, 문학기행이 단순한 관광과 갈라지는 지점을 우리는 비로소 체감하게 됩니다.
거장들을 이웃으로 둔 집, 초월주의의 한복판에서
이 집의 진짜 무게는 이웃들에게서 나옵니다. 콩코드는 19세기 미국 정신사의 한복판이었습니다. 아버지 브론슨 올컷은 미국 고유의 철학이라 불리는 초월주의(Transcendentalism)의 핵심 인물이었고, 그의 실험 공동체가 좌절했을 때 콩코드로 돌아오라 권한 이가 다름 아닌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이었습니다. 1879년부터 이 부지에는 브론슨이 세운 콩코드 철학학교(Concord School of Philosophy)가 운영되어, 당대 가장 성공한 성인 교육의 장이 되었습니다. 집 바로 옆 ‘힐사이드(Hillside)’를 사들여 ‘웨이사이드(Wayside)’로 이름 붙인 사람은 소설가 호손(Nathaniel Hawthorne)입니다. 에머슨, 소로(Henry David Thoreau), 호손이 모두 걸어서 닿는 거리에 살았으니, 어린 올컷은 미국 문학의 거장들을 이웃으로 두고 자란 셈입니다.
다만 이 풍경에는 한 가지 그늘이 있습니다. 워너나 스토우 같은 여성 작가의 인기가 높았음에도, 비평의 위계와 ‘진지한 문학’의 자격은 여전히 남성 쪽에 있었습니다. 읽고 쓰는 능력조차 성별에 따라 다르게 배분되던 시대, 올컷은 그 한가운데에서 ‘소녀’의 시선으로 글을 썼습니다. 콩코드를 단지 아름다운 문학 마을로만 보지 않고 누가 어떤 언어에 접근할 수 있었는가를 함께 떠올릴 때, 작은 아씨들의 작업은 한층 묵직하게 다가옵니다. 동시에 올컷이 이 고즈넉한 자연 속에서 에머슨, 소로와 교류하며 인간의 주체성과 자립 정신을 체득했다는 점도 잊어선 안 됩니다. 조 마치의 거침없는 독립심은 결국 콩코드라는 사상적 토양이 낳은 고유한 열매인 셈입니다.
작가의 능선, 슬리피 할로우 묘지에서
작은 아씨들 문학기행의 마지막 풍경은 묘지입니다. 슬리피 할로우 묘지(Sleepy Hollow Cemetery)의 완만한 언덕을 오르면 작가의 능선(Author’s Ridge)에 닿습니다. 이 좁은 숲길 위에 올컷, 에머슨, 소로, 호손이 돌멩이 하나 던지면 닿을 거리에 나란히 잠들어 있습니다. 살아서 이웃이던 이들이, 죽어서도 같은 능선에 모인 것입니다.
1855년 이 묘지가 문을 열 때 헌정 연설을 한 사람은 에머슨이었고, 그는 이곳을 “산 자들의 정원”이라 불렀습니다. 오늘날 올컷의 소박한 묘비 위에는 전 세계에서 찾아온 독자들이 두고 간 펜과 연필이 수북이 쌓입니다. 마치 그 작은 책상에서 펜을 들던 소녀 작가에게 보내는 후세의 답장 같습니다. 화려한 기념비가 아니라 글 쓰는 도구로 추모받는 작가. 이보다 더 올컷다운 풍경이 있을까요.

콩코드를 떠나며
콩코드의 다섯 풍경 — 렉싱턴 로드의 집, 반달 책상, 텍스트와 현실의 간극, 초월주의자들의 이웃, 그리고 작가의 능선 — 을 따라 걷는 동안, 우리는 작은 아씨들이 단지 ‘예쁜 가족 소설’이 아니라 한 소녀가 자기 언어를 갖게 되는 이야기였음을 다시 보게 됩니다. 1868년에 나온 이 소설이 150년이 넘도록 읽히는 이유는 단순한 가족애 때문이 아니라,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실패와 질투와 욕망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자신의 목소리를 어떻게 발견하는가를 끈질기게 묻기 때문입니다. 결혼과 함께 소녀 시절의 자유로운 습작이 사회적 규범 안으로 편입되는 결말은 한국의 많은 독자에게 깊은 아쉬움을 남기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기에 이 작품은 끊임없이 재해석됩니다. 그런 점에서 작은 아씨들은 시대를 초월한 작품이라기보다 시대를 앞서간 작품이라 부르는 편이 더 정확할지 모릅니다.
콩코드를 찾는 독자라면, 그 작은 반달 책상 앞에 잠시 서 보기를 권합니다. 그 자리에서 비로소 소설의 첫 문장이 다르게 들려올 테니까요. 다음 글에서는 같은 콩코드의 또 다른 이웃, 월든 호수로 걸어 들어간 소로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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