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 『맥티그』문학기행 3가지, 폴크 가에서 만난 시기와 계급의 얼굴
『맥티그』(McTeague)는 프랭크 노리스(Frank Norris)가 1899년에 발표한 미국 자연주의 소설의 대표작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을 단순히 탐욕과 파멸을 그린 비극으로만 읽는다면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됩니다. 이 글에서는 소설의 무대였던 샌프란시스코 폴크 가를 실제로 걸었던 기억을 더듬으며, 그 거리에 새겨진 시기와 계급 정체성의 문제를 함께 짚어보려 합니다.
노리스는 자신의 문학 비평 에세이 「낭만적 작가로서의 졸라」(“Zola as a Romantic Writer”)에서, 당대 문학계를 지배하던 윌리엄 딘 하웰즈 식의 점잖은 리얼리즘을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부르주아의 고요하고 사건 없는 일상, 응접실의 드라마나 찻잔을 두고 다투는 소리 속에는 삶의 진면목이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노리스가 주목한 것은 고삐 풀린 열정과 피,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점철된 거대하고 끔찍한 드라마였고,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존재가 바로 사회적 계급에서 밀려난 하층민들이라고 그는 주장했습니다.

맥티그: 샌프란시스코 이야기(McTeague: A Story of San Francisco)는 바로 그 신산한 삶 속으로 파고든 결과물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소설이 오랫동안 인종과 젠더, 자본주의라는 익숙한 틀로만 읽혀왔을 뿐, 정작 인물들의 마음속에서 소용돌이치는 감정 그 자체에는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국내 학계의 최근 논의는 바로 이 지점, 즉 시기(envy)라는 감정이 하층계급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파고듭니다.
폴크 가, 경계에 선 사람들의 거리
2003년 연구년으로 산호세 주립대학교의 마사 히즐리 콕스 스타인벡 연구센터에 머물던 시절, 주말이면 종종 샌프란시스코로 올라가 폴크 가(Polk Street) 근처를 걷곤 했습니다. 언덕을 오르내리는 좁은 골목, 안개에 젖은 목조 건물들, 그리고 어딘가 애매한 표정의 행인들. 그 거리는 부유하지도 가난하지도 않은, 정확히 규정되기 싫어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훗날 다시 『맥티그』를 펼쳤을 때, 그 애매함의 정체가 바로 계급이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노리스는 폴크 가의 주민들을 상점 종업원, 배관공의 도제, 소규모 상인들이라고 적었습니다. 이들은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사는 부유한 부르주아들과의 사이에 가로놓인 침해할 수 없는 경계를 밟지 않으려 늘 조심스러웠습니다. 행여나 거친 사람들로 오인당할까 봐 중산층의 점잖음을 필사적으로 흉내 내다 과하게 격식을 차리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이 거리를 실제로 걸으며 느낀 것은, 그 조심스러움이 소설 속 문장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그 언덕길의 공기 속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맥티그』의 무대는 단순히 돈이 없는 공간이 아니라, 가난 속에서도 사회적 인정을 갈구하는 인간들의 자존감의 각축장이었습니다.
이러한 계급적 애매함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개념이 바로 계급 위치와 계급 정체성의 불일치입니다. 영국의 여성 노동자를 연구한 한 사회학자의 논의를 빌리자면, 노동자에게 노동자 계급이란 잠시 머무르다 떠나야 할 정거장일 뿐, 도달해야 할 최종 목적지가 되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자신이 노동자 계급이라는 사실을 너무도 명확히 인식하면서도, 그 위치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심리가 폴크 가 사람들 전반에 흐르고 있었던 셈입니다.
그들이 상상하는 계급적 정체성은 언제나 중산층이었고, 그 중산층이라는 것이 실재하지 않는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상상된 정체성이 그들의 무의식을 지배하고 행동 양식을 통제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시기, 질투가 아니라 더 나은 삶을 향한 갈망
『맥티그』를 흥미롭게 여겨온 지점은, 이 소설이 단지 탐욕과 폭력을 그린 이야기로만 소비되기에는 아깝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시기를 단순한 질투로 이해하지만, 최근의 연구는 조금 다른 시각을 제시합니다. 맥티그 속 시기는 남의 것을 탐내는 감정이 아니라, 현재의 계급을 넘어 더 나은 삶으로 이동하고 싶은 욕망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시기의 감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빼앗긴 물건 그 자체가 아니라 소유권입니다. 온전히 자기 것이라 믿었던 무언가를 빼앗겼다고 느낄 때 분노가 발생합니다. 필요하지 않은 것이라도 남에게 빼앗기는 순간에는 그것이 원래 내 것이어야 했다는 감정이 생기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 소설에는 시기라는 감정을 보여주는 인물이 마커스와 맥티그만은 아닙니다. 청소부로 일하는 멕시코 이민 노동자 마리아 마카파는 자신보다 우아하고 발랄해 보이는, 소다수를 파는 젊은 여성들을 시기합니다. 그녀는 그 강렬한 감정을 해소하려는 마음에서 그들이 입은 것과 비슷한 옷을 사서 입습니다. 인종적 타자화로 인해 계급적 상승의 기회를 박탈당한 마리아가 같은 옷을 입음으로써 그녀들과 계급적으로 비슷해질 수 있다고 상상하는 이 장면은, 실질적인 계급 상승과는 무관하지만 더 나은 삶에 대한 열망과 분명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고물상을 운영하는 저코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트리나의 복권 당첨 소식을 듣자 거의 육체적 고통에 가까운 경련을 일으키며 신세를 한탄합니다. 아무리 죽도록 일해도 중산층의 계급적 정체성은 그에게 찾아오지 않는다는 사실, 그것이 손을 뻗으면 더욱 멀어지는 신기루라는 사실을 그 자신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그 허구의 정체성에 미련을 버리지 못합니다.
마커스 쇼올러는 트리나의 복권 당첨금 오천 달러를 자신이 온당히 가져갔어야 할 몫이라 여기며 극심한 박탈감에 시달립니다. 사실 마커스는 트리나에게 마음을 두고 있었지만 맥티그에게 사랑을 양보했고, 그 상실을 상징적으로 보상받으려는 듯 당구공을 입에 넣었다 뱉어내는 기묘한 놀이를 맥티그에게 시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천 달러라는 실질적인 부의 박탈은 그런 상징적 제의로는 결코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였던 친구 맥티그가 별안간 계급상승을 이루자, 자신이 허구적으로 간직해온 존경받는 중산층이라는 자아 이미지가 철저히 깨져버렸기 때문입니다. 결국 마커스는 맥티그의 치과의사 자격이 없음을 고발해 그를 다시 하층계급으로 끌어내림으로써 자신의 부당한 박탈감을 해소하려 합니다. 이는 폴크 가 사람들이 원했던 것이 부유함 그 자체보다 무시당하지 않는 존재감이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무너진 자존감, 손과 노동이 말하는 것

McTeague was a young giant, carrying his huge frame about with a slow, deliberate ponderosity.
맥티그는 느릿하고 육중한 몸을 지닌 젊은 거인이었습니다.
이 짧은 문장은 소설 전체의 비극을 예고합니다. 육체적으로는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다고 믿었던 맥티그가, 사회적으로는 가장 쉽게 무너지는 인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광산 노동자 집안 출신인 그는 치과의사가 되어 중산층에 편입되기를 소망했고, 트리나와의 결혼과 복권 당첨으로 그 꿈은 실현되는 듯 보였습니다. 트리나의 도움으로 이웃에게 정중히 인사하고 문화적 교양을 쌓으며, 그가 지녀왔던 어리석고 동물적인 습관에서 벗어나려 애쓰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커스의 밀고로 자격을 잃은 뒤, 맥티그는 게으르고 불성실한 일용 잡부로 전락하면서도 과거의 중산층 정체성을 버리지 못한 채 무력감과 모멸감에 시달립니다. 경제적 주도권을 쥔 트리나가 마치 그의 면전에 대고 노동을 자랑하는 듯 보일 때마다, 맥티그의 마음속에는 부인을 향한 시기의 감정이 싹틉니다. 트리나는 누가 보스인지 묻는 맥티그에게 일을 하는 것은 바로 나이며 당신은 아무것도 벌어들이지 못한다고 되받아칩니다.
경제적 주도권이 완전히 뒤바뀐 이 부부 관계 속에서, 가부장의 지위를 빼앗겼다는 원한은 트리나의 손과 손톱을 거대한 이빨로 물어뜯는 폭력으로 이어집니다. 손은 노동의 핵심이자 한 사람의 사회적, 경제적 가치를 결정하는 도구입니다. 맥티그는 아내의 손을 망가뜨려 자신과 같은 노동 불가능의 상태로 만듦으로써, 무너진 자존감을 상징적으로 되찾으려는 뒤틀린 방식을 택한 셈입니다. 외부적 요인으로 발생한 계급적 강등의 문제를, 부부 내부의 권력관계 문제로 바꾸어버린 것입니다. 계급의 문제가 젠더 폭력으로 뒤바뀌는 이 장면은,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보다 폴크 가를 실제로 걸은 뒤 훨씬 더 무겁게 다가왔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어볼 만한 것은, 마커스와 맥티그가 보여주는 폭력성의 공통된 뿌리입니다. 폭력의 원인을 규명한 한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일반적인 통념과 달리 자존감을 완전히 잃어버린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높게 평가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폭력을 저지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높은 평가가 타인에 의해 위협받을 때, 그리고 그 자존감의 근거가 박약할 때, 이른바 자기애의 거품이 터지면서 폭력성이 증대한다는 것입니다.
마커스의 높은 자기 평가는 허구의 중산층 정체성에 근거하고, 맥티그의 높은 자기 평가는 과거에 실제로 누렸던 중산층 정체성에 근거합니다. 말하자면 마커스는 실현되지 못한 중산층이고, 맥티그는 몰락한 중산층입니다. 그러나 허구가 현실에 의해 붕괴되고, 과거가 현재에 의해 무너지는 순간, 각자가 가진 높은 자존감은 순식간에 불안정해지고 분노와 폭력성으로 폭발합니다.
데스밸리, 그리고 다시 걷는 독자에게

소설의 대단원은 모든 물질적 탐욕의 끝이 얼마나 황량한지를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마커스의 추격을 피해 도망친 맥티그는 결국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데스밸리의 소금 평원 한가운데서 마커스와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두 사람이 서로를 죽일 듯이 웅크리는 이 장면은 영미문학사에서 가장 강렬한 자연주의적 파멸의 순간으로 꼽힙니다.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단순한 황금에 대한 맹목적 탐욕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온당하게 가졌어야 할 몫을 빼앗겼다는 울분이었고, 계급적 위치와 정체성의 불일치 속에서 깨어져 버린 자존감의 파편이었습니다.
몬테레이의 캐너리 로우를 걸었을 때도 비슷한 감정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텍스트로만 읽던 공간을 실제로 밟았을 때, 소설과 현실 사이에는 언제나 미묘한 간극이 남습니다. 그런데 그 간극이야말로 문학기행의 진짜 의미입니다.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그 도시가 소설을 완전히 대체하지 않는 자기만의 시간을 여전히 품고 있다는 뜻이니까요.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할 때 인간이 겪는 모멸감과 수치심은, 백 년 전 폴크 가의 하층민들만의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포크 가의 차가운 안개 속에서 시작되어 데스밸리의 뜨거운 사막에서 끝나는 이 문학기행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무거운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타인과의 비교에서 오는 시기로부터 자유로운가, 그리고 우리가 매달리는 계급적 자존감의 정체는 무엇인가. 맥티그의 하층계급 인물들은 단지 더 많은 돈을 원하는 단순 무지한 존재들이 아니라, 사회적 인정과 평가를 갈구했지만 그 욕망이 끝내 채워지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의 화려한 풍경 뒤에 숨겨진 폴크 가의 옛 흔적을 찾는 독자라면, 맥티그라는 거인 속에서 들끓었던 그 인간적인 고뇌와 슬픈 감정의 서사를 함께 걸어보시기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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