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무공훈장』, 가보지 못한 전장을 읽는 3가지 장면
스티븐 크레인(Stephen Crane, 1871-1900)은 스물네 살에 『붉은 무공훈장』(The Red Badge of Courage)을 발표하며 순식간에 미국문학의 유명 인사가 된 작가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저널리스트로 활동했고, 서른도 되지 못한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이 짧은 생애 동안 미국 자연주의 문학의 토대를 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붉은 무공훈장』은 그 가운데서도 가장 널리 읽히는 작품이며, 오늘날까지 미국문학사에서 가장 뛰어난 전쟁소설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그런데 이 소설을 두고 오래 고민한 문제가 하나 있다. 아직 그 배경이 된 버지니아의 전장을 걸어보지 못한 사람이, 이 작품을 문학기행이라는 이름으로 다룰 자격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답은 뜻밖에도 소설 자체가 이미 쥐고 있었다. 크레인 역시 전쟁을 겪어본 적 없이 이 작품을 썼기 때문이다. 그는 1871년생으로 남북전쟁이 끝난 뒤 태어났고, 실제 참전 군인들의 회고록과 매튜 브래디의 전쟁 사진, 남북전쟁 참전용사들의 증언을 탐독하며 상상만으로 이 전장을 구축했다고 알려져 있다. 텍스트로만 마주한 전장이 오히려 크레인이 의도했던 안개와 혼란의 감각에 더 가까이 다가서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이 글에서는 아직 밟아보지 못한 공간을 문학으로 상상하는 문학기행의 또 다른 방식을 정리해본다.

『붉은 무공훈장』, 전쟁보다 먼저 흔들리는 인간의 마음
『붉은 무공훈장』의 주인공 헨리 플레밍(Henry Fleming)은 전쟁터에 들어가기 전만 해도 자신이 그리스 시대의 영웅처럼 싸우게 될 것이라 믿었다. 신문과 포스터를 통해 접한 전쟁은 언제나 승전보로 가득했고, 그는 호머의 영웅처럼 큰 업적을 이루는 상상을 하며 입대했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장엄한 전투가 아니라 지루한 기다림과 정체 모를 소문, 서로를 향해 욕설을 퍼붓는 병사들의 어수선한 모습뿐이었다. 당대 미국 대중에게 인기 있던 전쟁소설들, 이를테면 리처드 하딩 데이비스의 『운 좋은 군인들』(Soldiers of Fortune) 같은 작품이 기사도 정신과 애국심으로 무장한 영웅을 그렸던 것과 비교하면, 크레인의 전장은 처음부터 결이 달랐다. 『운 좋은 군인들』의 주인공 로버트 클레이는 가상의 나라 올란초에서 독재 정부와 맞서 싸우며 순수한 조국애로 무장한 영웅으로 그려지고, 종국에는 그 나라의 영웅이자 해방자로 신화화된다. 헨리 플레밍은 이런 인물과 정반대의 자리에 서 있다.
There was a singular absence of heroic poses. The men lined up naturally, without any theatrical affectations.
영웅적인 포즈 따위는 이상하리만치 찾아볼 수 없었다. 병사들은 어떠한 연극조의 허세도 없이 자연스럽게 줄을 섰다.
첫 포격이 시작되자 헨리는 총을 버리고 숲으로 도망친다. 그가 느낀 것은 두려움 이전에 부끄러움이었다. 『붉은 무공훈장』이라는 제목이 사실은 아이러니를 품고 있다는 점이 여기서 드러난다. 헨리가 훗날 얻는 상처는 적탄이 아니라, 혼란 속에서 자신에게 다가온 아군의 소총 노리쇠에 맞아 생긴 것이다.
He wished that he too had a wound, a red badge of courage.
그는 자신 역시 하나의 상처, 즉 붉은 무공훈장을 가질 수 있기를 갈망했다.
이 어긋남은 시대 배경과 함께 읽을 때 더 선명해진다. 『붉은 무공훈장』이 발표된 1895년의 미국은 겉으로는 평온했지만 속으로는 요동치고 있었다. 자본가와 노동자의 갈등이 깊어지고, 헤이마켓 폭동과 풀만 파업 같은 사건들이 도시 곳곳을 뒤흔들었다. 1894년 워싱턴 포스트가 풀만 파업을 두고 시카고에서 벌어질 유혈 사태를 경고했을 정도로, 당시 중산층은 사회 질서가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렸다. 이런 시기에 대중 전쟁소설은 일종의 처방전 역할을 했다. 기사도 정신과 군인정신으로 무장한 영웅이 혼란을 잠재우고 사회를 바로 세운다는 서사가 독자들에게 위안을 주었던 것이다. 문학사가 T. J. 잭슨 리어즈는 당시 상류계층이 군인정신을 이상화한 것을 두고, 단순히 노동자를 제압하려는 욕구뿐 아니라 엘리트 계층 스스로를 정화하려는 심리도 있었다고 지적한다.
크레인은 이 흐름을 정확히 거스른다. 『붉은 무공훈장』에는 역사적인 전투명도, 뚜렷한 도덕적 메시지도, 대중소설 특유의 가식적인 기사도도 없다. 대신 그는 병사 한 명의 흔들리는 시야만을 따라간다. 흥미로운 것은 이 소설이 출간되었을 당시 평자였던 로버트 브리지가, 본능에 의해 움직이는 야만인들이야말로 전쟁의 실체이며 크레인이 재현한 전쟁이 오히려 실제와 가깝다며 찬사를 보냈다는 사실이다. 30년 넘게 미국문학을 강의하며 학생들에게 이 배경을 설명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문학작품 하나를 제대로 읽으려면 그 작품이 거스르고 있는 시대의 소음까지 함께 들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아직 가보지 못한 전장, 살리나스에서 배운 것
버지니아의 프레더릭스버그와 챈슬러스빌 국립전적지를 필자는 아직 걸어보지 못했다. 지도 위의 지명으로만, 그리고 『붉은 무공훈장』의 문장으로만 만난 공간이다. 대신 떠오르는 것은 2003년, 산호세 주립대학교 마사 히즐리 콕스 스타인벡 연구센터의 방문교수로 지내며 걸었던 캘리포니아 살리나스와 몬터레이 캐너리 로우의 풍경이다. 스타인벡의 생가 앞에 서서 그가 유년 시절 바라보았을 셀리너스 밸리의 흙바람을 그대로 맞았던 기억, 캐너리 로우의 낡은 통조림 공장 골조 사이로 스며들던 바다 안개의 냄새는 삼십 년 넘게 텍스트로만 가르쳐온 문장들을 순식간에 다른 것으로 바꾸어놓았다. 텍스트로만 읽던 공간을 발로 밟는 순간, 문학은 관념에서 감각으로 옮겨간다.

그래서 『붉은 무공훈장』을 대할 때 필자는 정직해지려 한다. 살리나스의 흙길은 실제로 밟아본 기억이지만, 챈슬러스빌의 숲은 아직 상상 속의 안개일 뿐이다. 그러나 크레인 자신도 전쟁을 직접 겪지 않은 채 이 소설을 썼다는 전기적 사실을 떠올리면, 가보지 않은 공간을 텍스트로 걷는 일 역시 문학기행의 한 방식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크레인은 남북전쟁 참전 기록과 사료를 탐독하며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전장을 상상만으로 그려냈고, 그 결과물이 오히려 실제 참전 작가들의 기록보다 더 생생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상상이 경험을 능가할 수 있다는 이 역설이야말로 아직 걸어보지 못한 독자에게 작은 위안이 된다. 언젠가 미국 동부를 다시 방문하게 된다면, 이번에는 그 숲길을 직접 걸어보고 싶다.
『붉은 무공훈장』은 반전소설인가, 짐 콩클린의 죽음이 던지는 질문
소설 중반부, 헨리의 동료 짐 콩클린이 전장에서 장렬하게 죽어가는 장면은 이 작품에서 가장 논쟁적인 대목으로 꼽힌다. 콩클린의 이니셜이 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와 같다는 점에 주목하는 비평가들은, 이 희생적인 죽음을 목격하며 헨리가 도덕적으로, 나아가 종교적으로 새롭게 태어난다고 주장한다. 반면 다른 비평가들은 정반대로 읽는다. 헨리는 포탄이 자욱한 위험한 전장에서 본능적으로 싸울 수밖에 없는 수많은 병사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며,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과도한 해석이라는 것이다. 헨리가 스스로 이기심이 없어진 숭고한 상태에 이르렀다고 착각하는 대목에서, 그가 실제로 성숙해진 것인지 아니면 그저 전쟁을 관광객처럼 구경하며 자기도취에 빠진 것인지는 끝까지 모호하게 남는다. 제임스 터틀턴(James Tuttleton)과 딜링햄(William B. Dillingham) 같은 비평가들이 오늘날 우리의 왜소한 모습과 헨리의 모습이 다르지 않다고 반박하는 지점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균열은 『붉은 무공훈장』 전체를 관통하는 더 큰 질문, 즉 이 작품이 반전소설인가 하는 논쟁으로 이어진다. 에릭 솔로몬(Eric Solomon) 같은 비평가는 이 작품이 기존 대중 전쟁소설의 영웅주의를 패러디했다고 평가한다. 반면 리처드 슬로트킨(Richard Slotkin)은 정반대의 시각을 내놓는다. 헨리가 마지막에 기사가 되어 돌진하는 장면이야말로 폭력을 통한 재생이라는 미국의 오래된 신화를 오히려 다시 만들어낸 것이라고 본다. 윌리엄 딜링햄(William B. Dillingham)은 한발 더 나아가, 헨리가 이룬 것은 특별한 성취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일상에서 우연히 얻는 성취와 다를 바 없다고 지적한다. 후기 구조주의자인 도날드 피즈(Donald Pease)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접근하는데, 이 작품이 애국심이라는 국가적 신화의 토대를 흔든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 상반된 해석들을 나란히 놓고 보면, 『붉은 무공훈장』의 진짜 성취가 더 선명해진다. 이 소설은 전쟁에 대한 확고한 메시지를 던지지 않는다. 대신 독자를 안개와 연기, 파편화된 감각 속에 그대로 세워놓고, 그 혼란 자체를 체험하게 만든다. 그래서 이 소설을 반전소설로 단정하기도, 그렇다고 전쟁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작품으로 단정하기도 어렵다. 크레인이 남긴 것은 결론이 아니라 질문이며, 그 질문은 13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열려 있다. 팀 오브라이언(Tim O’Brien)이 훗날 진짜 전쟁 이야기는 결코 도덕적일 수 없다고 썼던 것을 떠올려보면, 크레인은 이미 그보다 백 년쯤 앞서 같은 자리에 서 있었던 셈이다.
한 개의 깃발이 만들어 낸 가장 유명한 장면
소설 후반부에서 헨리는 자신의 상처를 훈장 삼아 군기를 향해 돌진하며 스스로 어른이자 기사가 되었다고 착각한다. 이 장면은 미국문학사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전쟁 장면 가운데 하나다.
Within him, as he hurled himself forward, was born a love, a despairing fondness for this flag near him. It was a creation of beauty and invulnerability.
앞으로 자신을 던지며 돌진할 때, 그의 가슴속에서는 곁에 있는 군기에 대한 애틋하고 절망적인 사랑이 움트고 있었다. 그것은 아름다움과 불사신의 창조물이었다.
이 장면을 학생들과 읽을 때 필자가 강조하는 지점은, 헨리가 이뤄낸 것이 고결한 의지의 승리가 아니라 생존 본능과 우연이 만들어낸 자기도취적 환상이라는 점이다. 학술적으로도 크레인의 전쟁 재현은 기존 대중 전쟁소설의 영웅주의를 완전히 해체했다기보다, 전쟁을 바라보는 방식 자체를 새롭게 만든 것으로 평가된다. 이 지점에서 필자는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를 떠올린다. 스타인벡이 상징을 통해 사람들을 공동체 밖으로 향하게 만들었다면, 크레인은 군기라는 상징을 통해 인간을 자기 내면으로 밀어 넣는다. 두 작가 모두 상징을 다루지만 그 상징이 향하는 방향은 정확히 반대다. 훗날 「노병」(“Veteran”)에서 늙은 헨리가 젊은이들에게 전쟁을 이야기하는 장면을 함께 읽어보면, 이 자기도취가 평생 그를 따라다녔는지도 흥미로운 후속 질문이 된다.
이 소설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기 전에 짚어야 할 지점도 있다. 필립 나이틀리(Philip Knightley)는 남북전쟁부터 제1차 세계대전 사이를 전쟁소설이 만개한 황금기로 부르는데, 이 시기 전쟁문학은 국내의 혼란스러운 사회 문제를 외부로 돌리는 일종의 탈출 문학이었다는 지적도 함께 따라온다. 에이미 카플란(Amy Kaplan)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런 전쟁문학이 현실의 도피가 아니라 오히려 자립정신이라는 남성적 가치를 새롭게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붉은 무공훈장』 역시 이 흐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 크레인은 애국주의자들의 부풀려진 희생을 비판하면서도, 정작 소설 마지막에는 헨리를 다시 한번 기사도적인 영웅의 자리에 세워두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소설의 진짜 성취는 전쟁에 대한 깊은 철학적 통찰이라기보다, 벌레가 몰려든 콩클린의 시체를 가감 없이 묘사하는 장면처럼 전쟁을 감각적으로 재현하는 새로운 방식에 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언젠가 걷게 될 숲, 『붉은 무공훈장』이 남긴 질문
『붉은 무공훈장』이 그려낸 전장은 화려한 영웅담의 무대가 아니라, 축축한 흙먼지와 자욱한 연기로 가득 찬 감각의 공간이었다. 그 공간을 아직 걸어보지 못한 독자로서 필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문장 하나하나를 지도 삼아 그 숲을 상상하는 것뿐이다. 30년간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강조해 온 것도 결국 같은 말이다.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영웅의 성공담을 관람하는 일이 아니라, 문장 속에 숨 쉬는 인간의 고뇌와 아직 밟아보지 못한 공간의 감각을 함께 상상하는 과정이다.
다음에 미국 동부를 여행하게 된다면, 워싱턴 D.C.에서 한 시간 남짓 떨어진 프레더릭스버그 전장을 걸어 보고 싶다. 조용한 숲길을 따라 걸으며, 크레인이 왜 전쟁의 영웅보다 한 명의 흔들리는 청년을 주인공으로 선택했는지 몸으로 확인하고 싶다. 그 숲을 실제로 걷는 날, 『붉은 무공훈장』을 다시 펼쳐 든다면 오늘 이 글과는 또 다른 문장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에게도 권하고 싶다.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 있다면, 그곳을 다룬 문학부터 먼저 걸어보시기를.
내부 링크 추천
- 스타인벡 살리나스 — 23년 전, 작가의 땅을 처음 밟던 날
- 몬터레이 캐너리 로우 문학기행
- 『Once There Was a War』, 존 스타인벡은 왜 전쟁터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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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 추천
- National Park Service — Fredericksburg & Spotsylvania National Military Park
- Stephen Crane House (뉴저지 애즈베리 파크 소재 크레인 생가 박물관)
- American Battlefield Trust — 남북전쟁 전장 지도 및 역사 자료 (Chancellorsville/Fredericksburg 전투 상세 페이지)
- Library of Congress — Civil War Photographs Collection
- Gilder Lehrman Institute of American History — 남북전쟁 1차 사료 및 교육 자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