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 런던의 『야성의 부름』이 걸어간 산타클라라에서 유콘까지의 길
잭 런던(J. London)은 문명세계의 안온한 틀을 깨고 독자를 알래스카의 거친 야생으로 안내하는 작가다. 하지만 잭 런던이 실제로 넘었던 길을 따라가 보면, 이 소설은 단순한 원시 회귀의 이야기가 아니라 벅(Buck)이라는 한 존재가 조직 속에서 배우고 성장해 마침내 리더가 되는 여정임을 알게 된다. 이 글에서는 캘리포니아 산타클라라 계곡에서 유콘 준주까지, 잭 런던의 『야성의 부름』(The Call of the Wild)이 걸어간 길을 짚어본다.
1897년 알래스카 유콘강 어귀에 금을 가득 실은 배가 도착했다는 소식은 미국 서부 해안 전역을 뒤흔들었다. 클론다이크 골드러시(Klondike Gold Rush)의 열기 속에서 스물한 살의 청년 작가 잭 런던도 이복누나의 남편 셰퍼드 선장과 함께 짐을 꾸려 북쪽으로 떠났다. 그는 그곳에서 금은 찾지 못했지만, 훗날 자신의 이름을 세계적으로 알린 이야기를 얻어 돌아왔다. 1902년 12월 1일 잭 런던이 써 내려가기 시작한 이 소설은 출간 당일 초판 만 부가 매진되었고, 20세기 전반 미국에서만 육백만 부, 전 세계적으로는 천만 부 가까이 팔려나갔다고 전해진다. 벅이라는 개 한 마리를 통해 그 시대 전체를 압축해 보여준 작품이 바로 이것이다.
산타클라라 계곡, 문명의 풍요에서 시작되다

『야성의 부름』은 흔히 알래스카 소설로 기억되지만, 정작 첫 장면은 지금의 실리콘밸리 중심부인 산타클라라 계곡이다. 밀러 판사(Judge Miller)의 넓은 저택에서 벅은 부족함 없는 삶을 누린다. 넓은 잔디밭과 포도원, 과수원까지 갖춘 이 공간은 당시 캘리포니아 상류사회의 풍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오늘날 애플과 엔비디아가 자리한 이 지역이 백여 년 전에는 끝없는 과수원과 목장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문학이 기억하는 공간과 지금 우리가 걷는 공간이 조용히 겹쳐지는 순간을 만나게 된다.
이 평화로운 저택에서 벅이 하루아침에 끌려나와 도착한 곳은 다이아 해변(Dyea Beach)이었다. 그곳에서의 첫날을 잭 런던은 이렇게 묘사한다.
Buck’s first day on the Dyea beach was like a nightmare. Every hour was filled with shock and surprise. … Here was neither peace, nor rest, nor a moment’s safety.
벅이 다이아 해변에서 보낸 첫날은 악몽과도 같았다. 매 순간이 충격과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그곳에는 평화도, 휴식도, 단 한순간의 안전도 없었다.
이 문장이 소설의 첫 장 제목이자 작품 전체를 여는 표현인 “원시로의 부름”(“Into the Primitive”)과 정확히 겹친다는 점은 우연이 아니다. 골드러시는 문명 속 질서를 하루아침에 무너뜨렸고, 평범한 삶을 살던 존재들을 극한 환경으로 밀어 넣었다. 강인한 썰매개에 대한 수요가 폭발하던 그 시대적 전환 속으로, 벅 역시 거대한 역사의 흐름에 휩쓸려 들어간 것이다. 흥미롭게도 잭 런던은 이 개의 성격을 온전히 상상만으로 빚어내지 않았다.
캐나다 허드슨베이 지역의 선교사 에저튼 영(Egerton R. Young)이 1902년에 펴낸 『북방의 개들』(My Dogs in the Northland)에는 실제 썰매개들의 개별적 기질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리더십이 강했던 쿠나(Koona)나 애꾸눈의 부아야저(Voyageur) 같은 개들의 특징이 훗날 벅과 그의 동료 솔렉스의 모습으로 되살아난다. 잭 런던 스스로도 이 책을 참고했음을 인정한 바 있다. 문학적 상상력이 완전한 허구가 아니라 실제 관찰의 축적 위에 세워졌다는 사실은, 이 소설을 현장 문학으로 다시 읽게 만드는 또 하나의 근거가 된다.
붉은 스웨터의 사나이, 조직의 첫 규율을 가르치다
다이아 해변에 도착한 벅이 처음 마주한 존재는 붉은 스웨터를 입은 남자였다. 이곳은 벅이 원시의 세계로 들어가기 전 거쳐야 했던 혹독한 오리엔테이션 공간이었다. 문명사회의 신사였던 벅에게 몽둥이는 거스를 수 없는 권력과 질서의 상징으로 다가온다.
That club was a revelation. It was his introduction to the reign of primitive law, and he met the introduction halfway.
그 몽둥이는 하나의 계시였다. 그것은 원시 법의 지배로 들어가는 그의 입문이었으며, 그는 그 입문을 겸허히 받아들였다.
이 통렬한 매질을 통해 벅은 조직 내에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고 상급자의 권력에 복종하는 법을 배운다. 19세기 말 미국 대기업과 근대적 관리 이론이 태동하던 시기, 잭 런던은 알래스카의 개 매매 현장을 빌려 자본주의 조직에 편입되는 존재의 실상을 알레고리로 그려낸 셈이다. 흥미로운 점은 잭 런던이 비슷한 시기에 발표한 단편 「디아블, 어느 개 이야기」(“Diable—A Dog”)와 이 장면을 비교해 보면 그 차이가 더 뚜렷해진다는 사실이다.
그 단편 속 개와 주인의 관계는 아무런 이유 없는 순수한 증오와 적대감으로만 채워져 있어, 두 존재가 서로를 미워하기 위해 관계를 유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벅과 붉은 스웨터의 남자 사이에는 잔혹함 속에서도 분명한 목적이 있다. 벅을 클론다이크의 혹독한 환경에 적응시키고, 앞으로 맡게 될 임무에 걸맞은 존재로 훈련시킨다는 목표다. 같은 폭력이라도 하나는 목적 없는 적대이고, 다른 하나는 조직의 논리를 따르는 훈육이라는 점에서 두 이야기는 근본적으로 다른 자리에 놓인다.
560마일을 달리는 썰매팀, 협력과 분업을 배우다

칠쿳 고개(Chilkoot Pass)를 넘어 도착한 유콘 준주(Yukon Territory)에서 벅은 캐나다 우정국 우편물을 나르는 프랑수아(François)와 페로(Perrault)의 썰매팀에 합류한다. 이 팀은 단순한 개들의 무리가 아니라 명확한 목표와 엄격한 역할 분담, 효율적인 소통이 작동하는 조직이었다. 벅이 처음 합류했을 때 프랑수아는 그를 일부러 노련한 데이브(Dave)와 솔렉스(Sol-leks) 사이에 배치한다.
Buck had been purposely placed between Dave and Sol-leks so that he might receive instruction.
벅은 지도를 받을 수 있도록 일부러 데이브와 솔렉스 사이에 배치되었다.
이는 오늘날 기업에서 신입에게 사수를 붙여 업무를 익히게 하는 방식과 정확히 닮아 있다. 당대 기록은 칠쿳 고개를 “군데군데 거의 수직에 가까운 산길”이라 묘사했는데, 이 길을 오르던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병을 얻거나 목숨을 잃었다. 잭 런던의 매형이자 원정의 재정을 댔던 셰퍼드 선장 역시 이 고개 앞에서 포기하고 돌아섰다. 문명에서 온 사람이 야생 앞에서 처음으로 무릎을 꿇는 지점, 그것이 칠쿳 고개였다.
이 첫 썰매팀에는 스피츠(Spitz)라는 노련한 리더견이 있었다. 벅이 조직 안에서 성장한다는 것은 곧 이 스피츠와의 충돌을 피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잭 런던은 그 갈등의 필연성을 이렇게 적는다.
It was inevitable that the clash for leadership should come. Buck wanted it. He wanted it because it was his nature, because he had been gripped tight by that nameless, incomprehensible pride of the trail and trace.
리더십을 둘러싼 충돌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벅은 그것을 원했다. 그것이 그의 본성이었기 때문이며, 썰매와 마구에 대한 이름 붙일 수 없는 자부심에 단단히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마구, 즉 하네스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조직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각각의 개는 하네스로 연결된 순간 하나의 몸을 이루는 개별 장기처럼 움직이며, 그 안에서 리더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벅의 욕망은 개인의 야심이 아니라 조직 안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확인하려는 몸부림에 가깝다.
반면 소설 후반, 골드러시에 뛰어든 핼(Hal)과 찰스(Charles), 머세이디스(Mercedes)의 팀은 조직 관리의 완전한 실패를 보여준다. 극한 환경의 불확실성에 대비할 계획도, 개들과 소통할 능력도 갖추지 못한 이들의 무능한 리더십은 결국 유콘강의 얇아진 얼음이 깨지며 팀 전체가 수장되는 비극으로 끝난다. 손턴이 강을 건너지 말라 경고했을 때 핼은 그 말을 무시하고 개들에게 채찍을 휘둘렀지만, 벅은 그 자리에 조용히 엎드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매를 맞으면서도 꿈쩍하지 않은 벅의 침묵은 언어가 아닌 방식으로 전달된 가장 절박한 경고였던 셈이다. 리더의 역량 부재와 소통의 부재가 조직 전체를 파멸로 이끄는 과정을, 잭 런던은 냉정하게 기록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죽음의 위기에서 벅을 구출한 존 손턴(John Thornton)과의 관계는 강제와 의무가 아닌 애정과 신뢰로 엮인 존재였다. 다른 주인들이 개의 안녕을 의무와 사업상의 필요로 돌보았다면, 손턴은 마치 자기 자식처럼 돌보았다고 잭 런던은 적는다. 손턴의 따뜻한 손길 아래서 벅은 태어나 처음으로 진짜 사랑을 경험하며, 마침내 무리를 이끄는 지도자로 성장할 원동력을 얻는다.
야성은 자연만을 뜻하지 않는다
많은 평론은 『야성의 부름』을 문명에서 야성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로 읽는다. 틀린 해석은 아니다. 그러나 최근 학계에서는 이 소설을 벅이 조직의 밑바닥에서 우두머리 자리까지 올라가는 성장 서사로 다시 읽는 시도가 나온다. 붉은 스웨터의 남자에게서 규율을, 프랑수아와 페로의 팀에서 협력과 역할 분담을, 손턴과의 관계에서 신뢰와 자발적 헌신을 차례로 배운 벅이 마침내 자신의 무리를 이끄는 지도자가 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유콘이라는 땅은 야생인 동시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누구보다 규율과 협업을 배워야 했던 역설적인 공간이었던 셈이다.
이런 독법을 흥미롭게 만드는 지점은, 벅이 조직 속에서도 결코 개성을 잃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20세기 중반의 조직 이론가들이 그려낸 인간상, 이를테면 거대 기업 안에서 개별성을 상실해가는 관리자의 모습과는 분명히 다르다. 벅과 그의 동료들은 각자의 기질과 고집을 간직한 채로 조직의 일원이 되며, 그 개성이 오히려 조직을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힘이 된다. 개별성과 조직성이 공존할 수 있다는 이 통찰이야말로, 잭 런던의 백 년도 더 된 이 소설이 낡지 않고 지금도 읽히는 이유일 것이다.
잭 런던 스스로 이 작품의 자매편이라 밝힌 『화이트 팽』(White Fang)과 비교하면 이 지점이 더욱 선명해진다. 『화이트 팽』의 주인공은 끝내 무리에서 홀로 떨어져 지내기를 원하는 개다. 반면 벅은 사람들과 개들 속으로 점점 더 깊이 들어가며 자신의 자리를 찾는다. 같은 북극권을 배경으로 삼고도 두 소설이 그리는 궤적은 정반대다. 하나는 고립을 향해, 다른 하나는 공동체를 향해 나아간다.
필자는 태평양 건너 캐나다 온타리오에 가족을 두고 지내며, 익숙한 곳과 낯선 곳 사이의 거리가 단지 비행시간으로 환산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 해에 걸쳐 체감해 왔다. 공교롭게도 잭 런던이 걸었던 유콘 준주 역시 캐나다 영토다. 대륙의 북쪽 끝, 그 얼어붙은 땅이 지금 내 가족이 사는 곳과 같은 나라 안에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산타클라라의 볕 좋은 저택에서 유콘의 얼음 강까지 이어지는 벅의 여정이 단순한 지도상의 거리가 아니라 심리적 낙차로 다가온다. 대륙을 사이에 두고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삶을 살아본 사람이라면, 문명과 원시 사이의 거리가 곧 마음의 거리이기도 하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칠쿳 트레일은 미국과 캐나다가 공동으로 관리하는 역사 탐방로로 남아 있다. 그 길을 걷는 여행자들은 여전히 급경사와 혹독한 날씨를 몸으로 겪는다고 전해진다. 문학의 현장을 걷는다는 것은 결국 작가가 겪은 물리적 고통과 감각의 흔적을 따라가는 일이다. 언젠가 그 능선을 직접 밟아볼 기회가 있다면, 벅이 처음 몽둥이의 위력을 배우던 순간의 공포와, 손턴과 나누었던 진짜 사랑의 순간을 함께 떠올리게 되지 않을까. 잭 런던의 그 길을 걷고 싶어질 독자에게 이 여정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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