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르테스의 바다를 읽는 4가지 시선: 스타인벡 문학의 열쇠는 왜 소설 바깥에 있는가?
코르테스의 바다는 멕시코 서해안과 바하칼리포르니아 반도 사이에 놓인 좁고 긴 바다의 이름입니다. 하지만 스타인벡 문학에서는 인간이 무엇을 안다고 말할 때 그 앎이 어디까지 정직할 수 있는지를 묻는 사유의 장으로 깊이 있게 다루어집니다. 이 글에서 코르테스의 바다가 왜 그의 소설 전체를 되감아 읽게 만드는 열쇠인지, 네 가지 시선으로 정리했습니다.
1940년 3월, 캘리포니아만의 어느 오후. 낚싯줄이 팽팽해지고 손바닥이 화끈거립니다. 물고기는 깊이 잠수했다가 결국 뱃전을 넘어옵니다. 멕시코 시에라(Mexican sierra). 옆구리의 빛이 맥박처럼 뛰고, 꼬리가 허공을 때립니다. 몇 분 뒤 그 물고기는 포르말린 병 속으로 들어가고, 등지느러미 가시는 XVII-15-IX라는 숫자로 기록됩니다. 같은 물고기입니다. 그러나 같은 진실은 아닙니다.

여섯 주간의 항해, 그리고 두 권의 책
1940년 3월 11일, 존 스타인벡과 해양생물학자 에드 리케츠(Ed Ricketts)는 몬터레이에서 목조 어선 웨스턴 플라이어(Western Flyer)호를 빌려 남쪽으로 향했습니다. 목적은 캘리포니아만 해안의 해양 무척추동물 채집이었습니다. 6주 뒤인 4월 20일 배는 돌아왔고, 두 사람은 1941년 말 『코르테스의 바다』(Sea of Cortez)를 공저로 펴냅니다. 1부는 서사적 항해 기록, 2부는 채집한 생물의 계통 목록이었습니다.
그런데 1951년, 이 책은 다른 얼굴로 다시 나타납니다. 계통 목록을 덜어낸 서사 부분만 『코르테스 바다의 항해일지』(The Log from the Sea of Cortez)라는 제목으로, 스타인벡 단독 저자명으로, 그리고 앞머리에 「에드 리케츠에 대하여」(“About Ed Ricketts”)라는 긴 추도문을 붙인 채로 말입니다. 리케츠는 1948년 건널목에서 열차와 충돌해 세상을 떠난 뒤였습니다.
필자가 대학원에서 미국문학을 전공하며 스타인벡 연구의 길에 들어섰을 때, 국내 연구의 대다수는 그를 사회주의적 리얼리즘 작가나 소외된 노동자의 대변인으로만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그 규정을 흔든 것이 바로 이 논픽션이었습니다. 2003년 연구년 기간, 살리나스의 스타인벡 생가와 국립 스타인벡 센터에서 자료를 살피고, 산호세 주립대학교 마사 히즐리 콕스 스타인벡 연구센터에서 방문교수로 지내는 동안, 필자는 자료실에서 1941년판과 1951년판을 나란히 펼쳐 본 적이 있습니다. 표지도 저자명도 다른 두 권이 사실상 같은 문장을 담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습니다. 그날 이후 코르테스의 바다는 필자에게 ‘읽어야 할 책’이 아니라 ‘설명해야 할 사건’이 되었습니다.
이 글의 논지는 단순합니다. 코르테스의 바다는 여행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식론적 선언문이며, 스타인벡의 모든 소설을 되감아 다시 읽게 만드는 열쇠입니다.
코르테스의 바다, 병 속의 물고기와 손 안의 물고기
앞서 언급한 시에라 대목은 이 책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면서, 동시에 가장 자주 오독되는 문장입니다. 사람들은 이 장면을 “과학 대 문학”의 대립으로 읽습니다. 숫자는 차갑고 체험은 뜨겁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텍스트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스타인벡은 가시 수를 세는 일이 틀렸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는 두 관찰이 서로 다른 실재를 만들어낸다고 말합니다. 살아 있는 물고기가 뱃전을 넘어오는 순간, “a whole new relational externality has come into being”(전혀 새로운 관계적 외부성이 생겨난다). 핵심 단어는 관계(relational)입니다.
포르말린 병 속의 시에라는 관계가 제거된 물고기입니다. 바다도, 낚싯줄도, 데인 손바닥도, 배의 흔들림도 모두 소거된 뒤 남은 잔여물입니다. 그 잔여물은 정확합니다. 다만 그 정확함은 세계를 잘라낸 대가로 얻은 것입니다.
미시적으로 보면 더 흥미롭습니다. 스타인벡은 실험실의 물고기를 묘사할 때 냄새를 끌어들입니다. 고무장갑, 산성 냄새, 눅눅한 공기. 반면 배 위의 물고기는 색과 움직임으로 서술됩니다. 감각의 위계 자체가 다릅니다. 앎의 방식이 다르면 동원되는 감각도 달라진다는 것, 이것이 텍스트가 말없이 수행하는 논증입니다.

그러므로 이 책은 바다를 측량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시선을 측량합니다. 분류하고 이름 붙이는 언어는 언제나 잔여를 남깁니다. 살아 있는 것의 비약과 불확실성이 그 잔여입니다. 스타인벡은 분류의 언어를 절대화하지 않고, 관찰과 성찰의 긴장을 끝내 화해시키지 않은 채 남겨 둡니다. 그 긴장이 코르테스의 바다의 문학성입니다.
여기서 이 책은 슬며시 문학론이 됩니다. 소설이란 무엇인가. 인물을 통계로 환원하지 않고, 관계 속에 놓인 채로 붙드는 기술입니다. 스타인벡이 평생 사회학적 자료가 아니라 인물의 손과 냄새와 침묵을 썼던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한국 독자에게 이 대목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모든 것을 수치로 환산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학생은 점수로, 노동은 시급으로, 심지어 읽기조차 요약문으로 대체됩니다. 코르테스의 바다는 80년 전에 이미 묻고 있었습니다. 병 속의 물고기만 세다가, 바다를 잊어버린 것은 아닌가.
‘왜’를 묻지 않는 사유, 코르테스의 바다가 발명한 태도
1940년 부활절 일요일. 항해 일지는 갑자기 서사를 멈추고 긴 철학 에세이로 미끄러집니다. 학계에서 흔히 ‘부활절 설교’라 부르는 대목이며, 코르테스의 바다에서 가장 사변적인 동시에 가장 중요한 장입니다.
여기서 제시되는 개념이 비목적론적 사고(non-teleological thinking)입니다. 어떤 현상 앞에서 “왜 그런가”, “누구 탓인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를 묻는 대신, “실제로 무엇이 있는가”를 묻는 태도입니다. 스타인벡과 리케츠는 이를 is-thinking, 곧 있음의 사유라 불렀습니다.
이 개념은 도덕적 무관심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급한 도덕화에 대한 저항입니다. 실업자를 게으르다고 판단하기 전에, 실업이라는 사태 자체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 원인을 지목해 분노를 배분하는 대신, 전체 그림 안에서 각 요소가 서로를 어떻게 지탱하는지 보는 것.
이 사유를 손에 쥐면 대표작들이 다르게 보입니다.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의 마지막 장면, 로즈 오브 샤론이 낯선 남자에게 젖을 물리는 결말은 오랫동안 감상적이라거나 억지스럽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비목적론의 렌즈로 보면 다릅니다. 그 장면은 어떤 결론도, 어떤 해결도 제시하지 않습니다. 다만 있음을 보여줍니다. 굶주린 몸과 넘치는 젖이 한 헛간 안에 함께 있다는 사실. 스타인벡은 답을 주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생쥐와 인간』(Of Mice and Men)에서 조지가 레니의 뒤통수에 총을 겨눌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설은 그 행위가 옳은지 묻지 않습니다. 옳고 그름의 언어가 도착하기 전에 사건은 이미 끝나 있습니다. 레니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도식으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인물은 언제나 어떤 장(field) 속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가족 속의 인간, 노동 집단 속의 인간, 생태적 환경 속의 인간, 역사적 압력 속의 인간 말입니다.
한 가지 아이러니를 덧붙이고 싶습니다. 두 남자가 만 위에서 무척추동물을 채집하고 ‘왜를 묻지 않는 법’을 논하던 1940년 봄, 대서양 건너 유럽은 불타고 있었습니다. 노르웨이가 침공당했고, 곧 프랑스가 무너집니다. 코르테스의 바다의 고요함은 세계의 소음을 모른 척한 결과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서로를 향해 저지르는 일을 이해할 다른 문법을 찾으려는 절박한 시도였습니다.
조간대에서 『분노의 포도』까지, 코르테스의 바다의 관계 철학

코르테스의 바다를 관통하는 하나의 이미지가 있다면 조간대(tide pool)입니다. 밀물과 썰물 사이, 하루에 두 번 세계가 되었다가 사라지는 작은 물웅덩이. 그 안에서 말미잘과 게와 불가사리는 서로를 먹고 먹히며, 그러나 전체로서는 하나의 평형을 이룹니다. 각각은 독립된 개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조수, 수온, 먹이, 포식자, 바위, 다른 생명체에 의존합니다. 하나의 생명은 다른 생명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몬터레이의 Pacific Biological Laboratories에서 해양 생물을 연구했던 리케츠는 생명체를 고립된 개체로 보기보다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이 관점은 스타인벡의 인물을 읽는 방식과 놀랍도록 닮아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실제 인물과 허구 인물의 일대일 대응이 아닙니다. 리케츠의 존재 방식이 스타인벡의 서술 방식으로 이동했다는 것, 그 점이 핵심입니다.
『통조림공장 골목』(Cannery Row)의 Doc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는 공동체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지배하지 않습니다. 주변 인물들을 도덕적 기준으로 재단하기보다 그들이 존재하는 방식을 관찰하고 받아들입니다. 매춘부와 부랑자와 잡화상과 생물학자가 뒤섞인 그 골목은 명백히 하나의 조간대입니다. 소설에 뚜렷한 플롯이 없다는 오랜 불평은 과녁을 잘못 짚었습니다. 조간대에는 플롯이 없습니다. 서로를 지탱하는 관계만 있을 뿐입니다.
『분노의 포도』와 함께 읽으면 연결은 더 선명해집니다. 초반의 조드 가족은 생존의 기본 단위입니다. 그러나 서사가 진행될수록 ‘가족’의 경계는 흔들립니다. 한 가족의 굶주림은 다른 가족의 굶주림과 이어지고, 개인의 생존은 집단의 조건과 분리될 수 없게 됩니다. 부분에서 전체로, 개체에서 관계로, 고립에서 상호의존으로. 조간대에서 관찰된 이 구조가 소설에서 사회적 형식으로 다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스타인벡의 공동체 의식은 선량한 사람들이 서로 돕자는 도덕적 표어에 머물지 않습니다. 인간은 애초부터 타인과 환경의 관계망 밖에서 존재할 수 없다는 인식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이 인식은 인간이 자연의 지배자가 아니라 더 큰 생명 질서에 속한 하나의 세포라는 결론으로 이어집니다. 인간의 탐욕이 전체의 균형을 깨뜨릴 때 그 피해가 결국 인간에게 돌아온다는 경고를, 그는 1940년대에 이미 적어 두었던 셈입니다. 기후 위기 앞에 선 오늘의 독자에게 이 책이 새삼 낯설지 않은 이유입니다.
한국 독자라면 여기서 자연스레 갯벌을 떠올릴 것입니다. 하루 두 번 드러나고 잠기는 서해의 갯벌, 그 진창 속에서 게와 짱뚱어와 사람이 함께 사는 시간. 우리는 오랫동안 자연을 관계의 대상으로 읽어 온 전통을 가졌고, 동시에 급격한 개발의 언어가 자연을 소거하는 장면도 익숙하게 겪었습니다. 코르테스의 바다는 바로 그 갈등을 하나의 바다에 압축해 놓았습니다.
지워진 이름들, 코르테스의 바다의 ‘우리’는 누구인가
이 책의 서술 인칭은 시종일관 ‘우리(we)’입니다. 그런데 그 우리는 대체 누구입니까.
가장 먼저 지워진 이름은 캐럴 스타인벡(Carol Steinbeck)입니다. 작가의 아내였던 그녀는 실제로 웨스턴 플라이어호에 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책의 문장 어디에도 그녀는 없습니다. 여섯 주를 같은 배에서 보낸 사람이 텍스트에서 완전히 증발한 것입니다. 이 침묵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여전히 스타인벡 연구의 곤혹스러운 질문으로 남아 있습니다.
두 번째 문제는 저자성 자체입니다. 비목적론 에세이의 상당 부분은 리케츠가 이전에 써 둔 원고에서 왔습니다. 1941년 초판이 두 사람의 이름을 나란히 올린 것은 정당했습니다. 그렇다면 리케츠가 죽은 뒤 그의 이름을 표지에서 덜어낸 1951년판은 무엇입니까.
배신이라 부르기에는 이야기가 복잡합니다. 스타인벡은 그 판본의 서두를 통째로 리케츠에게 바쳤기 때문입니다. 추도문 속의 리케츠는 정확한 관찰자이자 술을 좋아하고 바흐를 듣는 사람, 판단하지 않는 사람으로 그려집니다. 이름을 표지에서 지우는 대신, 그를 책의 심장부로 옮겨 놓은 셈입니다.
문학사적으로 흥미로운 지점은 그다음입니다. 1948년 리케츠가 죽은 뒤 스타인벡의 후기작은 힘을 잃었다는 평가가 오랫동안 지배적이었습니다. 필자는 이 통설에 반만 동의합니다. 잃은 것은 창작력이 아니라 대화 상대였습니다. 『불꽃처럼 타오르며』(Burning Bright)이나 『불만의 겨울』(The Winter of Our Discontent)의 어딘가 초조한 도덕적 어조는, 반박해 줄 사람이 없어진 사유가 혼자 목소리를 높인 흔적처럼 읽힙니다.
다시, 물고기 한 마리 앞에서
코르테스의 바다는 스타인벡의 서지에서 가장 덜 읽히는 책입니다. 소설이 아니라는 이유로 밀려나고, 생물 목록이 붙어 있다는 이유로 어렵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 책을 건너뛰고 스타인벡을 읽는 일은, 열쇠를 두고 방문을 두드리는 일과 같습니다.
이 책이 중요한 이유는 다른 소설들의 ‘정답’을 제공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스타인벡이 정답보다 관계를, 판결보다 관찰을, 고립된 개인보다 전체 속의 생명을 중시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에덴의 동쪽』(East of Eden)의 인간이 고정된 본질 하나로 설명되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그가 평생 붙들었던 질문은 결국 하나였습니다. 한 생명은 어디까지가 ‘하나’인가. 인간을 인간으로 붙드는 앎은 어떤 앎인가. 통계로 환원되지 않고, 도덕적 판결로 서둘러 닫히지 않으며, 관계 속에 놓인 채로 견디는 앎. 코르테스의 바다는 그 앎에 이름을 붙이려 한 여섯 주간의 기록입니다.
스타인벡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집어 들어 독자 앞에 전시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놓인 세계의 바위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릴 뿐입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우리가 얼마나 많은 타인과 환경과 우연에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병 속의 물고기를 세는 일을 그만두라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세기 전에, 한 번쯤 손바닥이 데일 만큼 그 물고기를 붙들어 보라는 것. 문학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일도 정확히 그것입니다.
[시리즈 내비게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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