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한 잔이 되찾아준 것들 — 불수의적 기억과 집의 의미 3가지
봉지를 뜯는 순간이었다.
손가락으로 Tim Hortons French Vanilla 봉지의 실링을 찢자, 그 향이 왔다. 달콤하고 묵직하고, 어딘가 낯선 듯 너무나 익숙한 그 냄새. 전주에 있는 나의 집 책상 위였다. 창밖은 6월 말의 습한 밤이었다. 그런데 나는 갑자기, 아주 잠깐, 캐나다 런던 온타리오(London, Ontario)의 한겨울 보도 위에 서 있었다.
이것이 바로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에서 말한 불수의적 기억(mémoire involontaire)이다. 의지로 불러낸 기억이 아니라, 감각이 먼저 문을 두드려 과거를 끌고 들어오는 것. 프루스트의 주인공은 홍차에 적신 마들렌 과자 한 조각으로 콩브레의 유년을 통째로 건져 올렸다. 나는 커피봉지 하나로 눈보라 속 캐나다를 불러왔다. 그리고 그 불수의적 기억이 데려온 것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오랫동안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했던 질문 하나였다. 집은 어디에 있는가. 젊을 때는 그 질문이 단순했다. 주소가 있으면 집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집이라는 단어는 자꾸 다른 곳을 가리키기 시작했다. 건물이 아니라 사람을, 장소가 아니라 기억을, 좌표가 아니라 감각을. Tim Hortons 커피봉지 하나가 그 질문을 다시 꺼내 들었다.

불수의적 기억의 첫 번째 층 — 냄새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불수의적 기억이 의지적 기억과 다른 것은 그 선명함이다. 억지로 기억하려 하면 사진처럼 평평하다. 그런데 감각이 불러온 기억은 입체적이다. 냄새, 온도, 그날 신었던 신발의 감촉까지 함께 온다.
인간의 감각 중 후각은 유일하게 시상(thalamus)을 거치지 않고 변연계(limbic system)로 직행한다. 다른 감각들은 정보처리의 필터를 거치지만, 냄새는 날것으로 기억과 감정의 중추에 닿는다.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가 아니었지만, 그는 후각의 이 원시적 정직함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프루스트는 그 메커니즘을 이렇게 썼다.
“The past is hidden somewhere outside the realm of our intelligence, beyond its reach, in some material object which we do not suspect.”
(과거는 우리 지성의 영역 밖 어딘가에, 우리가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어떤 물질 속에 숨어 있다.)
Tim Hortons 커피봉지가 내게는 그 물질 오브제였던 셈이다. 우리는 누구나 저마다의 마들렌을 하나씩 품고 산다. 어떤 사람에게는 오래된 노래 한 소절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어머니가 끓여주던 된장찌개 냄새다. 그것이 무엇이든, 감각은 이성보다 먼저 과거의 문을 열어버린다. 봉지를 뜯던 그 순간, 나는 런던 온타리오 어느 거리 앞에서 눈을 맞으며 Tim Hortons 라떼를 홀짝이던 그날로 정확하게 돌아갔다. 영하 15도였고, 눈은 수평으로 날렸고, 그래도 따뜻한 컵을 양손으로 감쌌을 때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던 그 감각.
이 Tim Hortons 원두커피는 며칠 전 집 인근에 있는 롯데마트에서 우연히 발견한 것이었다. 장을 보다가 진열대에서 눈에 익은 붉은 패키지를 발견한 순간, 나는 멈춰 섰다. 예전에는 없었던 것이다. 괜시리 반가워서 냉큼 카트에 넣었다.집에 돌아와서 그 봉지를 뜯는 순간, 롯데마트의 형광등 불빛 대신 캐나다의 눈보라가 밀려왔다. 뇌가 아닌 몸이 기억하는 것들. 불수의적 기억은 바로 그런 우연 속에 숨어 있다. 프루스트의 마들렌도 마찬가지였다. 의도하고 먹은 것이 아니라, 우연히 홍차에 적셔 한 입 베어 물다가 유년의 콩브레 전체가 터져 나온 것이다.
불수의적 기억은 계획하는 자에게는 오지 않는다. 방심한 순간, 불쑥 찾아온다. 롯데마트 진열대에서 붉은 봉지를 발견했을 때, 나는 그저 장을 보고 있었다. 캐나다를 그리워하려던 것도 아니고, 추억을 소환하려던 것도 아니었다. 그냥 반가웠다. 그 단순한 반가움이 방아쇠였다. 프루스트도 마들렌을 먹으며 유년을 떠올리려 한 것이 아니었다. 그냥 차 한 잔을 마시고 있었을 뿐이다.
불수의적 기억의 두 번째 층 — 눈보라 속에서 마시는 커피의 온도

바람 끝이 칼날 같던 그날, 얼굴을 때리는 눈보라 속을 걸으며 손에 쥐고 있던 따뜻한 라떼 한 잔의 온기를 기억한다. 그곳 사람들은 그 라떼를 “더블 더블(Double Double)”이라고 주문한다. 크림 두 번, 설탕 두 번. 처음엔 무슨 말인지 몰라 카운터 앞에서 잠깐 멍하니 섰었다. 그 말 한마디를 알게 된 순간 나는 이 나라의 일상 언어에 한 발 들어선 기분이었다. 언어를 안다는 것은 그 문화의 리듬을 안다는 것이다. 온통 하얗게 얼어붙은 이국 땅의 거리에서, 뺨은 얼어붙을지언정 손바닥을 타고 올라오던 소박한 온기는 삶이 아직 지속되고 있음을 알려주는 유일한 신호였다.
Tim Hortons는 캐나다 사람들에게 단순한 커피 브랜드가 아니다. 1964년 하키 선수 팀 호턴(Tim Horton)이 창업한 이 체인은 어떤 의미에서 캐나다 서민 정체성의 축약이다. 창업 이후 단 한 번도 고급화 전략을 택하지 않았다. 스타벅스가 “제3의 공간”을 내세우며 프리미엄을 추구할 때, Tim Hortons는 끝까지 서민의 커피로 남았다. 비싸지 않고, 화려하지 않고, 그냥 따뜻하다. 어쩌면 그것이 캐나다 사람들이 그 줄을 포기하지 않는 진짜 이유인지도 모른다. 고급스러움이 아니라 익숙함. 그 익숙함이 쌓여 정체성이 된다.
처음 런던 온타리오에서 아침을 맞았을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풍경이 있다. Tim Hortons 드라이브스루 앞에 자동차들이 끝도 없이 줄지어 선 모습이었다. 아무리 바빠도, 아무리 춥거나 더워도, 캐나다 사람들은 그 줄을 피하지 않는다. 한국이라면 저 줄 보고 그냥 지나쳤을 텐데 싶었지만, 그들에게 그 기다림은 불편함이 아니라 아침의 의식(ritual)이었다. 이른 아침 공사장 인부도, 오후의 간호사도, 눈보라 속 배달부도 모두 Tim Hortons 컵을 손에 든다. 그 컵을 들고 있는 순간만큼은 모두가 같은 캐나다 사람이다.
나도 그 줄에 한번 서봤다. 차가 없으니 걸어서 들어갔지만, 커피 한 잔을 받아 들고 나오는 순간 묘한 소속감이 들었다. 이방인이 한 나라를 이해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그 나라 사람들이 매일 하는 것을 함께 해보는 것이다. 그날 나는 Tim Hortons 라떼 한 잔으로 잠시, 아주 잠시, 캐나다 사람이 되었다. 이것이 불수의적 기억이 만들어지는 방식이다 — 몸이 먼저 기억을 새긴다.
불수의적 기억이 소환하는 것은 장소만이 아니다. 그때의 체온, 그 아슬아슬한 소속감, 이방인이면서 동시에 조금은 이 도시의 일원인 것 같았던 그 이중감각까지 함께 온다.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는 이런 순간을 에피파니(epiphany)라고 불렀다. 평범한 일상의 한 장면에서 갑자기 삶의 진실이 섬광처럼 드러나는 순간. 조이스의 에피파니는 성당의 계시가 아니라 더블린 거리의 한 노파, 술집 창문의 불빛, 눈 내리는 아일랜드 들판에서 왔다. 내게는 눈 속 Tim Hortons 컵이었다.

불수의적 기억의 세 번째 층 — 화면 속 신청번호와 세 개의 시제
나의 집에 있는 책상 위 세 개의 모니터가 동시에 켜져 있는 밤이 깊어간다. 왼쪽 화면에는 캐나다 이민부(Government of Canada) 사이트가 열려 있다. Spousal Sponsorship. Submitted. 그 두 단어 아래 날짜가 찍혀 있다. 오른쪽 화면에는 profhwang.com이 열려 있다. 가운데 노트북 화면에는 가족사진 — 작년에 가족 모두가 강원도 양양으로 여행갔을 때 바닷가 절벽 위에서 찍은 것. 그리고 책상 위에 Tim Hortons 커피가 담겨 있는 단풍잎 머그컵.
이 세 화면을 동시에 바라볼 때, 나는 어떤 시제에 있는가.
왼쪽은 미래를 기다리는 현재다. 오른쪽은 지금 이 자리에서 쓰는 현재다. 가운데는 과거의 한 순간이다. 그리고 커피 향은 이 세 시제를 하나로 포개 놓는다. 인간은 보통 한 번에 하나의 시제를 산다고 생각한다. 과거를 후회하거나, 미래를 걱정하거나, 현재에 집중하거나. 그런데 이 밤, 세 개의 화면 앞에 앉은 나는 세 시제를 동시에 살고 있다. 그것이 고통스럽지 않다. 오히려 이상하게 충만하다. 사랑하는 것들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골고루 걸쳐 있다는 뜻이니까. 프루스트가 그토록 길게 쓰려 했던 것이 아마 이것이었을 것이다 —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겹쳐지는 순간, 시간이 선형(linear)이 아니라는 것.
스타인벡은 『찰리와 함께한 여행』(Travels with Charley: In Search of America)에서 미국 전역을 혼자 여행하면서도 결국 자신이 떠나온 장소들을 계속 돌아본다. 그는 미국을 찾으러 떠났지만, 어쩌면 자기 자신을 찾으러 떠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나 역시 커피 한 잔을 통해 장소가 아니라 시간을 그리워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때 깨달았다. 집은 주소가 아니라 기억이라는 것을. 우리가 그리워하는 것은 벽돌과 지붕이 아니라, 그 공간에서 살았던 자신의 모습이다.
젊은 시절의 나는 집을 장소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집이라는 단어는 조금씩 다른 의미를 갖기 시작했다. 캐나다에 있다고 집이 되는 것도 아니고, 한국에 있다고 집이 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공간 안에서 내가 어떤 사람으로 존재하는가이다. 평온하게 책을 읽을 수 있는가. 좋아하는 커피를 마실 수 있는가. 내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곳은 이미 집이다. 집은 찾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생각보다 소박하다. 스타인벡이 긴 여행 끝에 결국 자기 집으로 돌아왔듯, 우리는 떠남과 돌아옴을 반복하면서 비로소 집의 무게를 알게 된다. 그리고 불수의적 기억은 그 집이 어디인지를, 우리도 모르는 사이 몸속에 새겨두는 방식인지도 모른다.

커피는 이미 다 내려졌다
불수의적 기억은 단순한 향수(鄕愁)가 아니다. 향수는 과거를 그리워하며 현재를 잃는 것이지만, 불수의적 기억은 과거를 현재로 불러와 지금 이 순간을 더 선명하게 만든다. 그 차이가 작은 것 같지만, 사실은 전부다. 향수에 젖은 사람은 지금 여기를 살지 못한다. 그러나 불수의적 기억을 가진 사람은 다르다. 과거가 현재 속으로 불쑥 걸어 들어와 함께 앉는다. 그리고 그 순간, 혼자인 것 같았던 지금이 갑자기 북적해진다. 그것은 내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를 향해 가는지를, 이성이 아닌 몸으로 알게 해주는 방식이다. 프루스트는 그래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것이 아니라 되찾는 것이라 했다. 찾는 것은 없던 것을 발견하는 일이고, 되찾는 것은 이미 내 안에 있던 것을 다시 만나는 일이다.
지금도 가끔 Tim Hortons 커피를 내린다. 커피 향이 퍼지면 캐나다가 떠오른다. 가족이 떠오른다. 눈보라가 떠오른다. 드라이브스루 앞에 끝없이 늘어선 자동차들이 떠오른다. 그렇다고 당장 캐나다로 가고 싶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이제는 그 향기를 전주의 학교 연구실이나 집에서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좋다. 익숙한 책상 하나, 오래된 머그컵 하나, 좋아하는 커피 향 하나. 그것들이 모여 어느 날 삶의 중심이 된다. 거창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Tim Hortons 봉지 하나가 내게 돌려준 것은 캐나다의 한겨울이 아니었다. 6월의 습한 전주의 밤, 커피 향 하나가 계절마저 지워버리고 데려온 것은 — 이방인이면서 동시에 어딘가에 속하고 싶었던 그 인간적인 감각이었다.
커피는 이미 다 내려졌다. 전주의 밤은 여전히 덥고 습하다. 6월의 열기가 창문을 타고 들어온다. 그런데 손에 든 머그컵은 따뜻하다. 계절이 어긋나도, 온기는 어긋나지 않는다.
하지만 첫 모금을 마시는 순간, 나는 다시 잠깐, 눈 속에 서 있다.
이상하게도, 그것이 위로가 된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Tim Hortons 봉지 하나씩을 품고 산다. 어떤 사람에게는 오래된 노래 한 소절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고향 어머니의 된장찌개 냄새다. 그 감각이 무엇이든, 그것은 우리가 사랑했던 시간의 증거다. 어쩌면 불수의적 기억이란,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이 우리를 혼자 내버려 두지 않는 방식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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