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작은 구멍으로 세상을 본다 — 색안경의 철학과 3가지 인간 이해
색안경의 철학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숙이 일상에 박혀 있습니다. 하지만 나이와 경험이 쌓이면 내가 끼고 있던 색안경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 글에서 배달 교수 황치복이 일상에서 건진 색안경의 철학에 관한 인문학적 통찰 3가지를 정리했습니다.

저녁 8시쯤이었다.
한 아파트 단지 앞에 차를 세우고 올리브영 배송할 물건을 들고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엘리베이터 앞에는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 한 명과 바로 옆에는 작업복 차림의 중년 남자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이상하게도 나는 두 사람을 아주 짧은 순간에 분류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왠지 전문직 같았고, 다른 한 사람은 현장 노동자 같았다. 그리고 그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 문득 스스로 놀랐다.
“나는 지금 무엇을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있는 걸까?”
집으로 돌아와 간단한 저녁 식사를 끝낸 후 책장을 뒤적이다가 문득 영국의 수필가 A. G. 가디너(A. G. Gardiner)의 에세이 「모자 철학에 대하여」(“On the Philosophy of Hats”)를 다시 읽게 되었다. 읽다가 웃음이 났다. 그리고 동시에 조금 서늘해졌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
색안경의 철학이 말하는 편견의 보편성 — 우리는 모두 작은 구멍으로 세상을 본다
가디너가 묘사한 모자 장수는 손님들의 머리 크기와 모자 사이즈만을 보고 그 사람의 직업이나 성격, 심지어 지적 수준까지 재단해버리는 인물이다. 변호사는 생각을 많이 해서 머리가 크고, 선장은 걱정이 많아서 두상이 비정상적으로 크다는 나름의 논리를 펼치면서. 정작 가디너 자신의 머리 크기를 보고는 “아주 평범한 머리”라며 별 볼 일 없는 사람으로 취급해버렸다. 그 한마디가 가디너를 철학으로 이끈다. 우리는 저마다 자신만의 구멍으로 세상을 들여다본다고.
가디너는 모자 가게를 나오면서 속으로 생각한다. 19세기 독일을 통일한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와 영국 총리를 네 번이나 역임한 글래드스턴은 7과 1/4 사이즈의 큰 머리를 가졌지만, 낭만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 바이런은 오히려 작은 머리였다. 그러나 괴테는 바이런을 셰익스피어 이후 유럽이 낳은 가장 위대한 두뇌라고 했다. 즉, 모자 사이즈가 인간의 깊이를 결정하지는 않는다는 것. 가디너는 그 반박을 모자 장수에게 직접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삼킨다. 그 장면이 묘하게 웃기면서도 씁쓸하다. 우리도 늘 그렇지 않은가. 하고 싶은 말을 속으로만 삼키고, 상대방이 붙여준 이름표를 조용히 달고 돌아서는.
가디너(1865~1946)는 20세기 초 영국을 대표하는 저널리스트이자 수필가였다. 그는 《데일리 뉴스》의 편집장을 지내며 날카로운 사회 비평으로 이름을 알렸지만, 정작 그를 오래 기억하게 만든 것은 “알파”(Alpha)라는 필명으로 쓴 짧은 에세이들이었다. 「모자 철학에 대하여」가 수록된 에세이집 『해변의 조약돌』(Pebbles on the Shore)은 1917년에 출간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시절이다. 유럽 전역이 이념과 민족과 계급으로 서로를 재단하며 피를 흘리던 그 시대에, 가디너는 모자 가게 한 구석에서 인간의 편견을 조용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전쟁터의 총성보다 더 오래 남는 것은 어쩌면 이런 작은 성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에세이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가디너는 재단사, 구두 장수, 치과 의사, 사업가, 금융가까지 차례로 소환한다. 재단사는 당신이 걸친 옷의 윤기로, 구두 장수는 뒷굽의 닳은 정도로, 치과 의사는 어금니 상태만 보고도 당신의 성격과 가정 환경과 재정 상태까지 결론 내린다고.
심지어 가디너는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소설가 새커리(William Makepeace Thackeray)의 『허영의 시장』(Vanity Fair)까지 끌어온다. 아버지 오스본이 아들 조지에게 말한다. “내 은행 잔고를 봐라. 그게 바로 근면과 투자의 결과다.” 그 옆에는 한때 더 나은 인간이었지만 파산한 세들리 씨가 있다. 오스본의 눈에 세들리는 실패자다. 그러나 새커리는 독자에게 속삭인다. 돈으로 재는 저울이 얼마나 자주 틀리는지를.
가디너가 이 장면을 인용한 이유는 분명하다. 직업적 편견만이 아니라 계급적 편견, 재산으로 사람을 줄 세우는 그 오래된 습관이 얼마나 보편적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다. 19세기 영국 소설 속 이야기지만, 읽다 보면 자꾸 지금 이 시대가 겹쳐 보인다. 우리는 여전히 그 색안경의 철학 안에 살고 있으니까.
그리고 마지막에 가디너는 자신도 예외가 아님을 솔직하게 인정한다. 가디너의 에세이는 결국 색안경의 철학에 대한 솔직한 자기 고백이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취향과 직업과 편견으로 색칠된 안경을 끼고 살아가며, 이웃을 자신만의 잣대로 재고, 자신만의 산수로 합산한다고. 주관적으로 볼 뿐, 객관적으로 보지 못한다고. 그래서 진실이라는 프리즘 앞에서 우리는 이토록 자주 틀린 답을 낸다고. 이것이 가디너가 말하는 색안경의 철학의 핵심이다.
그동안 수십년간 대학 강단에 서면서 나도 나만의 색안경이 생겼음을 부정할 수 없다. 나는 사람을 말을 얼마나 잘 다루느냐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스타인벡의 언어를 30년 붙들고 산 사람의 직업병이다. 어떤 학생은 문장을 한 줄만 말해도 책을 얼마나 읽었는지가 보이고, 어떤 사람은 단어 하나만 들어도 삶의 밀도가 느껴진다. 첫 수업에 들어오는 학생들을 보면서 나는 순간적으로 무언가를 읽는다. 자리 선택, 노트를 꺼내는 속도, 시선의 방향.
물론 틀릴 때가 훨씬 많다. 가장 구석자리나 뒷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던 학생이 학기 말에 가장 깊은 과제물을 제출하는 일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계속 읽으려 한다. 그것이 나의 구멍이다.

색안경의 철학이 무너지는 순간
전주에서 혼자 사는 밤은 조용하다. 가족은 캐나다 런던에 있고, 반려견 모카도 거기 있다. 늦은 저녁 배달 알바를 끝내고 돌아오면 텅 빈 집안이 나를 맞는다. 그럴 때 나는 종종 책을 꺼낸다. 가디너의 이 에세이처럼 얇고 가벼운 것들을.
배달 현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나의 색안경을 계속 흔들어 놓는다. 어느 날 밤, 엘리베이터도 없는 오래된 빌라 5층에 배달을 갔다가 물건을 내려놓고 인증샷을 찍으려는 순간, 나의 인기척을 들었는지 문이 열렸다. 꼬부랑 허리의 할머니였다. 물건을 건네자 나를 쳐다보며 할머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밥은 드셨어요?”
그 한마디에 나는 잠깐 멈췄다. 이 세상에서 가장 단순하고 따뜻한 언어. 박사 학위가 있고, 나름대로 수많은 논문을 썼으며, 스타인벡을 30년 넘게 연구한 사람이 지금 야간 배달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 할머니에게 그런 것들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오히려 그 무의미함이 얼마나 따뜻한지를 깨달았다. 우리가 평생 쌓아 올린 이력과 경력이라는 것이, 어쩌면 우리 스스로를 가두는 또 하나의 색안경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할머니는 배달 기사의 논문 편수나 강의 경력 같은 건 전혀 몰랐다. 그냥 늦은 밤 일하는 사람이 배고플까봐 물었을 뿐이다. 색안경의 철학도, 머리 사이즈도, 구두 뒷굽도 아닌 그냥 사람 대 사람의 말. 그 순간이 내게는 가디너의 어떤 문장보다 선명하게 남아 있다.
존 스타인벡은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에서 단순히 가난한 노동자들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존엄과 침묵 속 두려움을 함께 바라보았다. 겉모습만 보면 사람은 쉽게 분류된다. 그러나 인간은 언제나 표면보다 깊다. 배달을 하면서 내가 가장 많이 배우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우리 눈에 보이는 타인의 모습은 그 사람의 거대한 대륙 중 아주 작은 해안선 하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내 구멍은 얼마나 작은가 — 색안경의 철학 너머를 보려면
살아온 경험이 쌓일수록 색안경의 철학은 더 단단해진다. 배달 현장은 나의 잣대를 자꾸 뺏어간다. 문학을 모르는 사람이 더 따뜻할 수 있고, 논문을 한 편도 안 쓴 사람이 더 지혜로울 수 있다. 작년 겨울, 캐나다 런던으로 가기 위해 토론토 공항에 도착했을 때였다. 긴 비행 끝에 입국장을 지나는데 유리창 밖으로 대한항공 비행기가 보였다. WestJet 승무원인 딸 덕분에 코드셰어로 거의 공짜나 다름없이 타고 온 비행기.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이상한 감정이 밀려왔다. 나는 한국에서는 교수이고, 블로거이고, 유튜버다. 하지만 그 공항 안에서는 그냥 늙어가는 동양인 중년 남자 한 명일 뿐이었다. 그 순간 오히려 마음이 편안했다.
레이블이 없는 사람. 직함도, 논문도, 유튜브 구독자 수도 아무 소용없는 공간. 그 공간에서 나는 처음으로 색안경의 철학의 무게를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 낯섦이 오히려 숨통을 틔워주었다. 인간은 생각보다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 그리고 동시에 생각보다 훨씬 복잡한 존재다. 우리는 서로를 너무 쉽게 판단한다. 직업으로, 옷차림으로, 말투로, 학벌로. 하지만 그 공항 유리창 앞에 혼자 서 있던 그 순간만큼은, 나는 그냥 한 명의 사람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색안경의 철학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가디너도, 나도, 그 밤의 정장 신사도. 다만 자신이 어떤 구멍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지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 사이에는, 모자 사이즈 0.5만큼의 차이가 아니라 아주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중년의 인간관계란 결국 판단을 늦추는 능력인지도 모른다. 상대를 빨리 규정하지 않는 것. 조금 더 들어주는 것. 조금 더 기다리는 것. 젊을 때는 사람을 빨리 판단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인간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오히려 가장 위험한 것은 내 경험이다. 경험이 많아질수록 사람은 자기 확신이 강해진다. 그리고 그 확신은 종종 또 하나의 색안경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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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내가 내가 살아오면서 가장 많이 틀렸던 순간은 언제나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이야”라고 확신했을 때였다. 첫인상이 강렬할수록, 오래 알수록, 오히려 더 두꺼운 색안경을 쓰게 된다. 낯선 사람보다 익숙한 사람을 더 좁게 보는 역설. 가디너의 모자 장수가 단골손님의 머리 사이즈를 이미 다 안다고 믿었던 것처럼, 우리도 오래 알았다는 이유로 상대방이 변할 가능성을 닫아버리곤 한다.
배달 알바를 하면서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나는 그 사람들을 딱 한 번 만난다는 사실이다. 이력도 모르고, 과거도 모르고, 선입견도 없다. 그 순간의 표정과 말투와 눈빛만이 전부다. 그래서일까. 배달 현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때로는 강의실보다 더 선명하게 다가온다. 판단을 내리기 전에 이미 사라지기 때문에, 오히려 그 짧은 순간에 온전히 집중하게 된다. 어쩌면 색안경의 철학에서 벗어나는 가장 빠른 방법은 거창한 수련이 아니라, 그냥 처음 만나는 사람처럼 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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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이 오면 다시 캐나다로 날아가 가족들을 품에 안고 마당에서 모카와 함께 잔디를 밟을 것이다. 그때 아내에게 전주에서 건져 올린 이 작고 소박한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싶다. 우리가 타인의 겉모습에 속아 얼마나 많은 오해를 하며 사는지, 그리고 그 오해의 벽을 허물었을 때 얼마나 더 넓은 세상이 열리는지에 대해서.
오늘 밤도 배달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신호대기 중에 룸미러에 내 얼굴이 비쳤다. 머리는 예전보다 희어졌고, 눈가에는 피곤함이 남아 있다. 낮에는 강의하고 밤에는 배송을 하는 삶. 어쩌면 누군가는 그런 나를 이상하게 볼 수도 있다.
내일 아침 학교에서 만날 학생들의 얼굴들을 떠올려 본다. 나는 과연 그들을 나의 색안경으로만 바라보고 있었을까, 아니면 그들이 가진 무한한 가능성의 지평을 온전히 바라보고 있었을까. 어쩌면 우리는 평생 자신이 만든 좁은 시선 속에서 타인을 가두고, 동시에 자신마저 가두며 살아가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깊어가는 밤, 서재 창문 너머로 들려오는 나지막한 빗소리가 내 마음에 아주 긴 여운의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만의 색안경의 철학 속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중요한 건 안경의 색깔이 아니라, 그 안경 너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빛을 내고 있는지를 보려는 의지다.
당신은 지금 어떤 색깔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고 계신가요.
내부 링크 제안:
→ “소로우가 말한 삶의 여백 — 단순하게 살기의 인문학”
→ “『통조림 공장가』— 돈 없이 굴러가는 공동체는 어떻게 가능한가?”
→ 봄 감수성 | 배달 교수의 인문학적 단상 3가지
외부 링크 제안:
→ A. G. Gardiner 에세이 원문 (Project Gutenberg): https://www.gutenberg.org/ebooks/2545
→ Wikipedia — Alfred George Gardiner: https://en.wikipedia.org/wiki/Alfred_George_Gardine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