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견의 시간이 가르쳐준 3가지 — 15년을 함께 늙어온 모카

사진을 정리하다가 손이 오래 머문 한 장이 있었다.
여름 방학중에 가족이 있는 캐나다에 있는 동안 집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포트 스탠리(Port Stanley) 호수가에 가족과 함께 갔을 때 내가 모카를 뒤에서 미소를 지으며 쳐다보던 사진이었다. 예전에는 그 사진을 볼 때마다 “모카가 참 귀엽다.”는 생각부터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사진 속에서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모카가 아니라 시간이었다.
2010년 8월 26일에 태어난 노견의 시간 속 주인공, 모카. 크림색 털을 가진 토이 푸들 한 마리를 런던 인근의 농가에 가서 데리고 와 우리집 거실 바닥에 처음 발을 딛던 날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까만 눈이 얼굴의 절반을 차지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는 소파 아래 숨어버렸다. 그게 시작이었다.
올해로 모카는 만 15살이 됐다. 인간 나이로 치면 70대 후반. 귀 주위 털이 희끗해졌고, 점프도 예전 같지 않다. 잠이 많아졌다. 계단에 오르는 것을 지금은 힘들어 한다. 항상 뒷 마당에서 용변을 보던 모카가 가끔 실내에 용변을 보고 미안해 하는 거 같다. 소파 위에서 눈을 반쯤 감고 있는 모습이 이제는 어딘가 조각상 같은 데가 있다. 그 사진을 바라보는 나 역시 그만큼의 시간을 함께 걸어왔다.
노견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보다 훨씬 가파르고 고요하게 흘러간다.
노견의 시간이 만든 증인

존 스타인벡(John Steinbeck)은 『찰리와 함께한 여행』(Travels with Charley)에서 여행 내내 스탠더드 푸들인 찰리(Charley)에게 많은 말을 걸었다. 찰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계속 이야기했다.
처음 이 작품을 읽었을 때는 그 장면을 단순한 애견인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수십 년 동안 스타인벡을 연구하면서 내 생각은 조금씩 달라졌다. 찰리는 대화의 상대가 아니라 시간의 증인이었다.
스타인벡이 이 여행을 떠난 것은 1960년, 그의 나이 58세 때였다. 노벨문학상을 받기 2년 전이었고, 건강도 예전 같지 않았다. 오랫동안 살아온 미국이 자신이 알던 그 나라인지 확인하고 싶었다고 그는 썼다. 그런데 막상 길을 나서보니, 미국보다 자기 자신이 더 낯설어졌다. 스타인벡은 이렇게 썼다.
“When I was very young and the urge to be someplace else was on me, I was assured by mature people that maturity would cure this itch. When years described me as mature, the remedy prescribed was middle age. In middle age I was assured greater age would calm my fever and now that I am fifty-eight perhaps senility will do the job.”
젊었을 때는 어른이 되면 이 방랑벽이 사라진다고 했다. 어른이 되니 중년이 되면 가라앉는다고 했다. 중년이 되니 노년이 되면 잠잠해진다고 했다. 이제 쉰여덟이 됐으니, 아마 노망이 들어야 끝나려나.
이 문장을 읽을 때마다 나는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그 웃음 뒤에는 묘한 동질감이 있었다. 나이가 들수록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더 선명해지는 것들이 있다. 스타인벡은 그것을 알면서도 길을 나섰고, 찰리는 그 옆에 있었다.
찰리는 스탠더드 푸들이었다. 프랑스산 대형 푸들로, 스타인벡은 그를 “샤를 르 쇼앙” 즉 “찰리”라고 불렀다. 여행 내내 찰리는 말이 없었다. 그러나 스타인벡은 찰리가 자신의 말을 듣고 있다고 믿었다. 아니, 정확히는 — 찰리 앞에서 말할 때 비로소 자신의 생각이 정리된다고 느꼈다.
나는 그 감각을 안다.
사람은 기억을 잃기도 하고, 해석을 바꾸기도 한다. 그러나 반려견은 늘 같은 자리에서 같은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본다. 그 변하지 않는 시선 때문에 우리는 오히려 자신의 변화를 더 선명하게 보게 된다.
모카도 내게 그런 존재였다. 사진마다 계절은 달랐고, 집도 달랐고, 나의 모습도 달랐다. 하지만 모카의 눈빛만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변한 것은 나였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스타인벡은 여행을 마치고 뉴욕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런 말을 남겼다. 미국을 찾아 떠났지만 결국 자신을 발견하고 돌아왔다고. 찰리는 3만 킬로미터를 함께 달렸다. 단 한 번도 “왜 이 길이냐”고 묻지 않았다. 그냥 옆에 있었다.
강의중에 스타인벡을 이야기할 때마다 학생들에게 자주 했던 말이 있다. “이 책은 목적지를 읽는 책이 아니라 속도를 읽는 책입니다.” 그 말은 이제 나 자신에게도 그대로 돌아온다. 노견의 시간은 빠른 목적지가 아니라 느린 동행이라는 것을. 모카는 어느새 그렇게 걷고 있다.

기다린 것은 누구였을까
모카는 처음부터 캐나다에 있었다. 런던 인근 농가에서 데려온 날부터 죽 그 집에서 살고 있다. 모카는 아내와 딸, 그리고 아들과 함께. 전주에는 오로지 나 뿐이었다. 이후 방학이 될 때마다 캐나다 런던 온타리오로 날아갔다. 피어슨 공항에서 집까지 오는 약 2시간 동안 차 안에서 나는 항상 같은 장면을 상상했다. 현관문을 여는 순간, 제일 먼저 뛰어올 것이다.

언제나 모카가 먼저였다.
아내도 딸도 아들도 기쁘게 맞아주었지만, 온몸을 흔들며 발 위로 올라오는 것은 모카였다. 마치 내가 몇 달이 아니라 몇 년 만에 돌아온 것처럼. 개는 시간을 계산하지 않는다. 코로나 때 약 3년 정도 집에 가지 못하고 코로나가 끝난 후 집에 갔을 때도 나를 엄청 반겨주었다. 기다림의 밀도를 측정하지 않는다. 그냥 기다렸고, 돌아왔고, 기쁘다.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는 반려견을 주인공으로 삼은 소설 『플러시』(Flush)에서 이런 장면을 썼다.
“They conveyed shapes of feelings which each understood perfectly without the necessity of spoken words.”
그들은 말 한마디 나누지 않고도 서로가 가진 감정의 형태를 온전히 이해했다.
모카와 나 사이에도 언어가 필요하지 않았다. 눈빛 하나, 꼬리의 각도, 내 손길을 받아들이는 미세한 움직임만으로도 우리는 세상 그 어떤 정교한 논리보다 확실한 유대감을 공유했다.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작가 존 그로건(John Grogan)은 『말리와 나』(Marley & Me)에서 이렇게 썼다.
“Such short little lives our pets have to spend with us, and they spend most of it waiting for us to come home each day.”
우리 곁에서 그들이 보내는 삶은 너무 짧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의 대부분을, 그들은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데 쓴다.
그런데 나는 되물었다. 기다린 것은 누구였을까. 멀리서 모카의 사진을 들여다보는 노견의 시간 속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사실 나 자신이 아니었을까.
노견의 시간이 가르쳐준 3가지
노견의 시간 속에서 모카는 내게 책이 가르쳐주는 것과는 결이 다른 것들을 전해주었다.
첫 번째는 순응이다. 모카는 노견의 시간을 몸소 받아 들이는 것 같다. 모카는 약해진 다리와 조금씩 흐려지는 눈을 탓하지 않는다. 예전처럼 격렬하게 공을 쫓아가지는 못하지만, 그저 주어진 하루의 햇볕을 온전히 즐기고 소파 위의 안락함에 온몸을 맡길 뿐이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상실에 괴로워하고 과거의 영광을 붙잡으려 안간힘을 쓰는 인간의 탐욕과 달리, 노견의 시간은 변해가는 몸과 환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담담함을 보여준다. 그 고요한 숨소리를 들으며, 노견의 시간 앞에서, 나 역시 다가오는 변화를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지 조용히 배운다.
두 번째는 조건 없음이다. 나는 글을 잘 쓰든 못 쓰든, 강의가 잘 됐든 안 됐든, 모카에게는 나는 그냥 ‘오늘 돌아온 사람’이다. 개는 당신의 성취를 평가하지 않는다. 더 이상 쾌활하게 짖지도, 쉴 새 없이 꼬리를 흔들지도 않는 지금의 모카가 나란히 누워 그저 털을 비비며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거대한 위로가 된다. 그게 위로인지 무관심인지 처음에는 헷갈렸다. 지금은 그게 위로라는 걸 안다. 노견의 시간이 가르쳐준 가장 따뜻한 수업이다.
세 번째는 유한함이다. 이게 제일 어렵다.
그로건은 마를리(Marley)가 13살이 되던 겨울, 그의 곁을 떠나는 장면을 썼다. 나는 그 장면을 처음 읽었을 때 책을 덮어버렸다. 감상적이 된 것이 멋쩍어서가 아니라, 너무 실제 같아서였다. 이 장면은 언젠가 내 이야기가 될 것이다. 모카는 이미 15살이다. 2010년생인 녀석을 바라보는 일은 언젠가 찾아올 이별의 순간을 미리 연습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슬픔은 절망이 아니다. 오히려 유한하기에 오늘 이 순간 마주하는 눈빛이 얼마나 소중한지,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나눈 온기가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지를 깨닫게 하는 거울이다. 슬픔이 깊어질수록 녀석을 향한 고마움과 사랑 역시 더 단단해진다. 모카가 예전보다 늦게 일어나는 것을 볼 때마다, 나는 노견의 시간이 품은 가장 무거운 챕터를 천천히 읽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함께 늙어간다는 것
모카와 나 그리고 우리 가족은 그렇게 노견의 시간 속에서 15년을 이어왔다.
전주와 런던 온타리오 사이, 방학마다 건너는 태평양 위 어딘가, 학기 중의 전주의 집과 캐나다 집의 거실 소파 사이. 모카는 그 거리를 알지 못할 것이다. 다만 돌아왔을 때 흔든다. 떠날 때 바라본다.
사람들은 반려견을 키운다고 말한다. 하지만 오래 함께 살아본 사람이라면 그 표현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반려견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함께 늙어간다.
스타인벡은 『찰리와 함께한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 역시 언젠가 다시 캐나다로 돌아갈 것이다. 그날 모카가 현관 앞에서 천천히 걸어와 예전처럼 내 발등에 얼굴을 기대 준다면, 그 순간만큼은 긴 여행도, 긴 세월도 모두 하나의 문장으로 이어질 것 같다.
그로건이 마를리에게 작별 인사를 하면서 남긴 말이 있다.
“A good dog. You’ve always been a good dog.”
좋은 개였어. 언제나.
나는 아직 그 말을 할 준비가 안 됐다.
스마트폰 화면을 끄고 조용히 눈을 감으면, 여전히 캐나다의 거실 소파 위에서 부드러운 숨을 몰아쉬고 있을 모카의 온기가 손끝에 선연하게 만져지는 듯하다. 젊고 눈부셨던 시절의 모카도 사랑스러웠지만, 느릿한 걸음으로 노견의 시간 속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는 지금의 녀석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숭고하고 아름답다.
어쩌면 기다림이 사랑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나는 책이 아니라 크림색 푸들 한 마리에게서 배웠다.
함께 늙어간다는 것은, 서로의 시간을 끝까지 기억해 주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모카야, 조금만 더 기다려라. 아빠가 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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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 추천:
Goodreads — Marley & Me (John Grogan)
The National Steinbeck Center 공식 사이트
John Steinbeck 『찰리와 함께한 여행』(Travels with Charley)
Project Gutenberg — Virginia Woolf, Flush 원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