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에 한 번씩 현관문이 닫힌다 — 승무원 딸을 둔 기러기 아빠의 기록
우리 집은 작은 공항이었다
— 기러기 아빠가 쓴 인문 에세이: 웨스트젯 승무원 딸의 출근길을 보면서 …
기러기 아빠로 살아온 20년. 기러기 아빠의 하루는 떠남과 기다림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이별이 아니라, 사랑이 반복되는 방식입니다. 이 글에서 E.B. White와 Anne Morrow Lindbergh의 문학을 통해, 떠나는 뒷모습을 끝까지 바라보는 것이 부모의 사랑임을 이야기합니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딸깍. 짧고 단호한 소리였다.
그 소리가 사라지고 나면, 집 안은 순식간에 달라진다. 거실도, 주방도, 복도도 —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는데, 공기의 밀도가 다르다. 방금 전까지 캐리어 바퀴가 굴러가던 거실 바닥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진다.
나는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승무원 딸은 이미 드라이브웨이를 지나 차에 올랐을 것이다. 캐나다 항공사 웨스트젯(WestJet) 네이비 유니폼. 단정하게 묶은 머리. 한 손에 쥔 캐리어 손잡이. 뒷모습만 보아도 안다 — 저 아이는 지금 아버지의 세계가 아닌, 자신의 하늘을 향해 걷고 있다.

4일에서 5일 정도. 그 시간은 승무원인 딸이 집을 비우는 시간이다. 비행을 마치고 돌아와 며칠을 쉬다가, 또 유니폼을 꺼내 입고, 캐리어를 챙겨 현관을 나선다. 이 리듬이 반복된 지 이제 몇 년이 되었다. 익숙해질 법도 한데, 매번 저 뒷모습 앞에서 나는 멈추고 만다.
집 안은 금세 조용해진다. 아까까지 식탁에 놓여 있던 머그컵도 그대로 있고, 현관 한쪽에 기대어 있던 운동화도 그대로 있는데 이상하게 공간 전체가 비어 보인다. 정작 하늘을 나는 사람보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사람이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집 안은 밀물이 빠져나간 갯벌처럼 순식간에 적막 속에 잠긴다. 영원하지 않은 이별이라 할지라도, 보내는 이에게는 매 순간이 작은 이별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떠남의 궤적 위에서 만나는 기억들
캐리어를 끌고 가는 딸의 뒷모습 위로, 다른 뒷모습들이 겹쳐 떠오른다.
유치원 버스를 타러 가방을 메고 걸어가던 작은 뒷모습. 캐나다로 이민 후 런던의 고등학교 첫날, 혼자 정문 안으로 들어서던 뒷모습. 대학에 입학하던 해 기숙사 복도를 걸어가던 뒷모습. 그리고 지금 — 웨스트젯 유니폼을 입고 드라이브웨이를 가로지르는 뒷모습.
나는 지금 누구를 보고 있는가. 승무원 딸인가, 아니면 내가 기억하는 그 모든 뒷모습들인가.
미국의 수필가 E.B. 화이트(E.B. White)는 1941년 「호숫가로 다시 한번」(“Once More to the Lake”)이라는 에세이를 썼다. 어린 시절 여름마다 찾았던 메인 주의 호수를 수십 년 만에 아들과 함께 다시 찾은 이야기다. 화이트는 그 호수에서 묘한 경험을 한다.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는데, 어느 순간 자신이 아버지인지 아들인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아들의 손이 낚시줄을 던지는 모습이 바로 수십 년 전 자신의 손처럼 느껴진다. 과거와 현재가 한 장면 위에 포개진다.
※ E.B. White와 부모의 시간에 관한 더 깊은 이야기는 이 글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 [E.B. White 관련 포스트 ]
나는 그 에세이를 오래전에 읽었다. 그런데 기러기 아빠로 살면서 승무원인 딸의 뒷모습을 볼 때마다 비로소 그 문장들이 살아서 다가온다. 시간은 앞으로 흐르지만 부모의 기억은 늘 뒤를 향해 흐른다. 그래서 부모는 현재의 자녀와 과거의 자녀를 동시에 사랑하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화이트는 에세이 마지막에서 아들이 젖은 수영복을 끌어올리는 모습을 보는 순간 자신의 몸에서 갑자기 오한이 느껴졌다고 썼다. 자식의 젊음 앞에서 문득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것이다. 그 마지막 문장이 이 에세이를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인간의 조건에 관한 이야기로 만든다.
나는 화이트처럼 죽음을 예감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딸의 뒷모습이 현관문 너머로 사라지는 순간마다, 무언가가 조용히 지나가는 것을 느낀다. 시간이라고 불러야 할지, 세월이라고 불러야 할지 — 어쨌든 그것은 손에 잡히지 않는 무엇이다.
기러기 아빠의 하루 — 우리 집은 오래전부터 작은 공항이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오래전부터 공항의 사람이었다.
전주와 캐나다 런던 온타리오. 두 도시를 이십여 년 넘게 오갔다. 아내가 캐나다에 먼저 자리를 잡았고, 아이들이 그 곁에서 자랐다. 나는 전주에서 강의를 하고, 방학이 되면 비행기를 탔다. 인천공항, 토론토 피어슨 국제공항. 출국장과 입국장. 기다림과 재회. 공항은 내게 단순한 교통 시설이 아니었다. 사랑의 방식이었다.
그 세월 동안 나는 늘 보내는 사람이거나,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아내를 보냈다. 아이들을 보냈다. 그리고 다시 만났다가, 또 보냈다. 누군가 늘 떠났고, 누군가 늘 기다렸다. 그리고 반드시 누군가 돌아왔다.

그런데 이제 딸이 하늘을 직장으로 가졌다. 내가 공항에서 가족을 기다리던 사람이었다면, 딸은 이제 공항에서 출발하는 사람이 되었다. 무언가 한 세대의 이야기가 완성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우리 집은 오래전부터 작은 공항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기러기 아빠의 일상은 지금도 계속된다. 전주에 혼자 살고 있는 나는 매일 오전 10시 30분, 와이프와 페이스톡을 한다. 캐나다와 한국의 시차를 넘어 연결되는 그 짧은 영상통화. 그때 내가 가장 먼저 꺼내는 말은 언제나 정해져 있다.
“예지 집에 왔어?”
“예지 출근했어?”
딸이 비행을 나간 날이면 질문이 조금 달라진다.
“예지가 자기한테 전화했어?”
“예지 지금 어디에 있대?”
와이프는 웃으면서 대답한다. 나도 웃으면서 묻는다. 그런데 이 짧은 질문들이 사실은 이십여 년 동안 이 가족과 나눠온 사랑의 방식이었다.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전주의 작은 방에서, 북미 대륙의 하늘 어딘가를 날고 있을 딸을 떠올리며 묻는 그 한마디. 기러기 아빠의 하루는 그 질문 하나로 시작된다.
딸이 처음 웨스트젯 합격 소식을 전화로 알려왔을 때, 나는 기뻤다. 목소리에서 흥분이 느껴졌고, 나도 모르게 “잘했다”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그런데 전화를 끊고 나서 이상하게도, 오래전 인천공항에서 아내와 아이들을 배웅하던 그 감각이 되살아났다. 기쁨과 아득함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그 감각.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는 사람만이 아는 감정의 온도다.
사랑한다는 것은 허락하는 것이다

앤 머로우 린드버그(Anne Morrow Lindbergh)는 『바다의 선물』(Gift from the Sea)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사랑한다는 것은 붙잡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여정을 허락하는 것이다.”
린드버그는 대서양 단독 횡단으로 세계적 영웅이 된 찰스 린드버그의 아내였다. 남편이 하늘로 떠날 때마다 기다려야 했던 사람. 그 기다림의 세월 속에서 그녀는 사랑의 본질을 이렇게 정리했다. 붙잡는 것이 아니라 허락하는 것.
기러기 아빠인 나는 이 문장을 읽을 때마다 린드버그의 상황과 내 상황이 묘하게 역전되어 있다는 생각을 한다. 린드버그는 비행사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였다. 나는 비행하는 승무원 딸을 바라보는 아버지다. 기다리는 사람과 보내는 사람. 다르지만 결국 같은 자리에 서 있다.
존 스타인벡(John Steinbeck)의 『붉은 망아지』(The Red Pony)에서 소년 조디는 성장하면서 아버지의 울타리를 조용히 벗어난다. 말을 키우고 잃으며, 삶의 잔인함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배운다. 그 이야기의 본질은 농장 이야기가 아니다. 성장이란 결국 누군가의 세계에서 걸어나오는 것이라는 이야기다.
※ 스타인벡 『붉은 망아지』의 성장과 떠남에 관한 문학 분석은 이 글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 [Red Pony 포스트]
내가 30년 넘게 스타인벡을 연구해온 사람이면서도, 승무원 딸의 뒷모습을 볼 때마다 조디가 떠오르는 것은 그래서인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나는 딸의 손을 잡고 길을 건넜다. 이제는 딸이 수백 명의 승객을 태운 비행기를 타고 구름 위를 건너간다. 부모가 하는 일은 결국 하나인지도 모른다. 언젠가 떠날 사람을 사랑하는 일.
반복되는 기다림이 주는 선물
손튼 와일더(Thornton Wilder)의 희곡 『우리 읍내』(Our Town)에서 주인공 에밀리는 죽음 이후에야 비로소 깨닫는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식탁 위의 커피잔,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 마주 앉아 나누는 사소한 아침 대화 같은 평범한 일상들이 얼마나 경이롭고 아름다운 기적이었는지를.
승무원 딸이 집에 있을 때는 당연하다. 냉장고 문을 여는 소리도, 늦은 밤 부엌 불이 켜지는 것도, 주말 오후 거실에서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모습도. 그저 평범한 일상이다. 그러나 공항으로 떠나고 나면 그 평범함이 얼마나 특별한 것이었는지 알게 된다. 어쩌면 가족이란 그런 존재인지도 모른다. 곁에 있을 때는 공기처럼 자연스럽고, 떠난 뒤에는 공기처럼 그리운 사람.
4~5일에 한 번씩 찾아오는 딸의 떠남은 역설적으로 내게 『우리 읍내』의 깨달음을 매번 선물한다. 딸이 비행을 떠나고 비어 있는 방, 정돈된 식탁을 보며 나는 비로소 딸이 집에 머물던 그 며칠의 시간이 얼마나 찬란한 일상의 기적이었는지를 절감한다. 그리고 다시 돌아올 딸을 위해 거실의 불을 켜두고, 따뜻한 찻잔을 준비하는 그 기다림의 시간마저도 기러기 아빠이기에 누릴 수 있는 축복이라는 것을 이제는 받아들이게 된다.

오늘도 현관문이 닫혔다
오늘도 현관문이 닫혔다. 캐리어 바퀴 소리가 드라이브웨이를 지나 멀어졌다. 차 문 닫히는 소리. 엔진 소리. 그리고 정적.
집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예전에는 이 조용함이 빈자리처럼 느껴졌다. 지금은 조금 다르게 읽힌다. 이 고요함은 상실이 아니다. 승무원 딸이 자신의 하늘을 가졌다는 증거다.
그리고 나는 안다. 4일, 혹은 5일 뒤, 저 현관문이 다시 열릴 것이다. 캐리어 바퀴 소리가 다시 들려올 것이다. 모카가 꼬리를 흔들며 언니가 왔다고 반기며 달려나갈 것이다. 딸은 유니폼을 벗고, 소파에 가방을 던지고, 냉장고 문을 열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내일 아침 10시 30분에도 나는 와이프에게 페이스톡을 걸 것이다. 그리고 어김없이 물을 것이다. “예지 집에 왔어?” 혹은 “예지 출근했어?” 와이프는 또 웃으면서 대답할 것이다.
그 짧은 한마디 안에 이십 년이 들어 있다. 기러기 아빠로 떠나는 사람을 사랑했고, 기다리는 일을 배웠고, 돌아오는 사람을 맞이하는 법을 익혔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는 법을 배우는 데 이십 년이 걸렸다. 그 사람이 반드시 돌아온다는 것을 믿는 데 또 몇 년이 걸렸다.
이제 나는 안다. 떠나는 사람을 사랑하지만, 돌아올 사람이라는 사실 또한 사랑하게 된다는 것을.
딸은 바다처럼 멀리 떠나고, 나는 해변에 홀로 남아 밀려올 파도를 기다린다. 딸이 안심하고 돌아와 쉴 수 있도록, 언제나 같은 자리에 서서 묵묵히 모래사장을 다지는 단단한 해변이 되어주리라 다짐해 본다.
생각해보니 우리 집은 오래전부터 작은 공항이었다.
내부 링크:
스타인벡은 왜 소년에게 망아지를 죽게 했을까 — 『붉은 망아지』 3가지 핵심 분석
E.B. White 관련 Life & Humanities 포스트
체면 때문에 지갑을 열었던 날 — 우리가 없으면서도 있는 척하는 3가지 이유
외부 링크:
Anne Morrow Lindbergh, Gift from the Sea → https://www.goodreads.com/book/show/22769.Gift_from_the_Sea
E.B. White, “Once More to the Lake” → https://www.theatlantic.com/magazine/archive/1941/08/once-more-to-the-lake/6597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