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때는 왜 그러지 못했을까 — 세대 차이로 읽는 3가지 젊음의 용기
기말고사가 끝나면 대학 캠퍼스는 이상하게 조용해진다. 시험지를 거두고 나면 학기의 소음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는 것처럼, 복도에도 강의실에도 공기만 남는다. 그런데 그 고요함은 오래가지 않는다. 성적 입력을 앞두고 출석, 과제, 중간/기말고사 등등의 성적자료를 정리하다 보면, 어김없이 문자 메시지나 카톡들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성적이 학생들에게 아직 공개되기도 전에.
“교수님, 제가 마감일에 LMS 접속이 안 됐는데요, 과제는 제출하려고 했거든요.”
“교수님, 지각이 좀 늦어서 출석 체크를 못 받았는데, 결석으로 처리된 건 아니죠?”
읽다 보면 피식 웃음이 난다. 억울함의 선제 진술이랄까. 세대 차이를 이야기할 때 흔히 가치관이나 문화를 들먹이지만, 나는 이 메시지들 앞에서 세대 차이의 가장 솔직한 얼굴을 본다. 자기 입장을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얼굴. 나 때는 저러지 못했는데, 라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것이 내가 처음으로 실감한 세대 차이였다.
사실 그 생각은 반성인지 감탄인지 모를 복잡한 감정을 달고 온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 교수는 일종의 절대 영역이었다. 성적에 이의를 제기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출석에 문제가 생기면 속으로 삭이거나, 기껏해야 친한 조교에게 조심스레 부탁해보는 것이 전부였다. 교수실 문을 직접 두드리는 것은 굉장한 결심이 필요한 일이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 결심 자체를 좀처럼 하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내 앞의 학생들은 다르다. 당돌하다는 표현이 맞지 않는다. 그보다는 자연스럽다는 쪽이 정확하다.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고 자신의 입장을 전달하는 것을 특별한 용기의 발휘라고 여기지 않는다. 교수라는 직위가 의사소통의 벽이 되지 않는다. 처음에는 그것이 낯설었다. 어딘가에서 “요즘 애들은 버릇이 없어”라는 말이 들려오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버릇의 문제가 아니라면?

사흘을 벼르다 수화기를 든 소년
세대 차이는 교실 안에서만 느끼는 것이 아니다. E.B. 화이트(White)의 에세이 「어느 미국 소년의 오후」(“Afternoon of an American Boy”)를 다시 꺼낸 것은 바로 그 즈음이었다. 화이트는 10대 시절, 자신이 은밀히 짝사랑하던 여학생 Eileen에게 뉴욕 플라자 호텔의 티댄스에 함께 가자고 전화를 걸었던 이야기를 쓴다. 춤도 출 줄 모르면서, 용기도 없으면서, 사흘을 벼르다 마침내 수화기를 든 소년. 그가 전화를 걸기까지의 준비 과정이 웃음을 자아낸다. 기차 시간을 알아봤고, 가져갈 돈을 계산했고, 입을 옷을 골랐고, 첫 마디와 두 번째 마디를 머릿속으로 반복해서 연습했다. 그리고 드디어 전화기 앞에 서서, 수분 동안 수화기를 들지 못한 채 떨었다.
“As an exhibit of teen-age courage and ineptitude, it never fails to amaze me in retrospect. I am not even sure it wasn’t un-American.”
(10대의 용기와 무능함의 전시물로서, 돌이켜 생각해보면 늘 나를 놀라게 한다. 그것이 비미국적인 행동이 아니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다.)
웃음이 나면서도, 어딘가 찡하다. 용기와 무능함이 공존하던 그 나이. 나는 그 나이에 무엇을 했던가. 하고 싶었지만 못 했던 것들, 말하고 싶었지만 삼켰던 것들이 흐릿하게 떠오른다. 기억이 선명하지 않다는 것은, 어쩌면 그만큼 저지르지 않았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화이트의 소년은 어이없는 짓을 했지만 그 어이없음이 수십 년 뒤에도 생생하게 기억에 새겨져 있다. 저질러야 기억이 남는다. 잘 해낸 것은 흐릿해지고, 떨면서 했던 것은 선명하게 남는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 사람은 점점 덜 저지르게 된다. 실패할 것 같은 일은 시작하지 않고, 부끄러울 것 같은 행동은 미리 차단한다. 능숙함이 쌓일수록 무모함은 사라진다. 그리고 어느 순간, 무모했던 시절이 가장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기억은 세부를 지워버리는 대신 의미를 남긴다. 화이트가 수십 년이 지난 뒤에도 그 하루를 글로 쓴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는 과거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현재의 자신이 비로소 이해하게 된 과거의 의미를 기록했다.

“보이지 않는 플라자 호텔”에서 식은땀 흘리는 사람들
화이트의 에세이에서 내가 가장 오래 머문 장면은 상상 속 청문회 장면이다. 훗날 하원 반미활동위원회 위원장이 된 Parnell Thomas가 증인석의 그를 심문한다.
“Do you recall an afternoon, along about the middle of the second decade of this century, when you took my sister to the Plaza Hotel for tea under the grossly misleading and false pretext that you knew how to dance?”
(이 세기의 두 번째 십 년 무렵 어느 오후, 당신이 춤을 출 줄 안다는 터무니없이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거짓 핑계를 대고 내 여동생을 플라자 호텔 티파티에 데려갔던 사실을 기억하십니까?)
꿈속에서 화이트는 “Yes, sir”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귀에는 춤의 북소리가, 목에는 시나몬의 씁쓸달콤한 맛이 되살아온다. 죄책감과 그리움이 뒤섞인 감각. 나는 이 장면을 읽을 때마다 생각한다. 인간이 기억하는 것은 완벽했던 순간이 아니라, 어설프게 용기를 냈던 순간이라고.
캠퍼스 잔디밭에서 스마트폰 화면을 넘기며 웃음을 터뜨리는 학생들을 바라볼 때, 그들과 나 사이에 메울 수 없는 거리가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런데 조금 더 들여다보면, 저 매끄러운 일상 밑에도 지독한 불안과 서툴음이 숨어 있다. 지금 내 앞의 학생들도 저마다 보이지 않는 플라자 호텔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어설픈 춤을 추고 있는 중일지 모른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긴장하는 마음, 미래가 불확실해 불안한 마음,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 그 감정들은 세대 차이를 뛰어넘는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 떨림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화이트의 소년이 사흘이나 걸렸던 그 전화를, 지금 학생들은 카카오톡 메시지 하나로 해결한다. 두려움이 줄어든 것이다. 아니, 더 정확히는 그 두려움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교수는 절대 영역이 아니라 소통의 상대다. 그것은 무례가 아니라 진화다.
두려움 대신 조용함을 채웠던 시절
지금 내가 받는 메시지들을 다시 읽어본다.
“교수님, LMS가 마감 직전에 오류가 났는데요.”
“지각했는데…. 혹시 출석으로 봐주실 수 있을까요?”
틀린 말은 아니다. 억울할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을 말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전 세대와 다른 점이다. 나는 그 나이에 그런 메시지를 보내지 못했다. 보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교수님의 결정은 그냥 교수님의 결정이었고, 나는 그 아래에서 조용히 수긍하는 쪽이었다.
조용한 수긍이 미덕인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진짜 미덕이었는지, 아니면 두려움을 미덕이라고 불렀던 것인지, 나이가 들수록 판단이 흐려진다. 나는 두려움 대신 조용함을 채웠고, 지금 내 앞의 학생들은 두려움 대신 말을 채운다. 세대 차이는 결국 그 두려움의 자리에 무엇을 채웠느냐의 차이인지도 모른다.
화이트는 에세이 말미에서 이렇게 쓴다. 늙어가는 수많은 남자들이 자신의 “Willie Baxter 시절”을 애정을 가지고 회상한다고. 사랑이 아직 정교해지기 전의, 그 소중하고 짧은 시절. 어리석었지만 진심이었던 시간. 나는 그 구절에서 오래 멈췄다. 세대 차이를 이야기할 때 어느 쪽이 옳은가, 라고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 시대가 다르면 미덕도 다르다. 다만 가끔 이런 상상을 한다. 지금의 나라면 그때 그 교수실 문을 두드렸을까. 하고 싶은 말을 삼키지 않았을까.
대답은 여전히 불확실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 있다. 화이트의 소년이 사흘을 벼르다 걸었던 그 전화처럼, 떨면서라도 무언가를 했던 시간이 결국 기억으로 남는다는 것. 그리고 지금 내게 메시지를 보내는 학생들은, 적어도 그 전화를 걸고 있다는 것.
어쩌면 나이가 든다는 것은 세월이 쌓이는 것이 아니라, 오래된 기억들을 조금씩 다시 이해해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오늘도 캠퍼스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첫사랑 때문에 고민하고, 누군가는 LMS 마감 시간을 넘겨서 밤새 속을 태우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아직 모르겠지만, 수십 년 뒤 그 초조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미소 짓게 될 가능성이 크다.
세대 차이를 넘어 공명하는 것은 결국 떨림의 기억이다. 씁쓸하고 달콤하다. 마치 시나몬 토스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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