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면성 — 황금빛 노을 속 해안도로를 함께 달리는 두 사람, 고독에서 사랑으로

존 스타인벡 『달콤한 목요일』의 양면성 5가지: 고독은 어떻게 사랑으로 통합되는가

양면성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서로 다른, 때로는 모순되는 두 속성이 함께 존재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스타인벡 문학에서 양면성은 닥터(Doc) 내면에 깃든 고독한 그림자와 빛이 공존하다가, 마침내 사랑과 공동체를 통해 통합되어 가는 깊은 심리적 여정으로 다루어집니다. 이 글에서는 『달콤한 목요일』(Sweet Thursday)이 보여주는 양면성의 의미와, 그것이 어떻게 고독을 넘어 사랑으로 통합되는지를 다섯 단계로 나누어 정리해 보려 합니다.

1954년에 출간된 『달콤한 목요일』은 『캐너리 로우』(Cannery Row)의 후속작이다. 흔히 『토르티야 플랫』(Tortilla Flat), 『캐너리 로우』, 『달콤한 목요일』을 몬터레이 삼부작이라 부르는데, 앞선 두 작품이 사회적 약자들의 비애를 그렸다면, 이 마지막 권은 같은 그늘 속에서 구원의 가능성을 노래한다는 차이가 있다. 많은 독자들은 이 작품을 스타인벡의 가장 밝고 유쾌한 소설 가운데 하나로 기억한다. 실제로 소설 곳곳에는 유머와 기발한 사건들이 흘러넘친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 경쾌한 표면 아래에는 좀처럼 가시지 않는 끈질긴 양면성이 자리하고 있다.

30년 넘게 스타인벡을 연구하면서 필자가 늘 흥미롭게 느껴온 점은, 스타인벡이 가장 행복한 장면을 그릴 때조차 인간 존재의 양면성을 결코 잊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2003년 연구년 기간, 캘리포니아 살리나스의 국립 스타인벡 센터(National Steinbeck Center)와 산호세 주립대학교 마사 히즐리 콕스 스타인벡 연구센터(The Martha Heasley Cox Center for Steinbeck Studies)에서 이 작품을 정신분석학적 관점으로 처음 재해석했을 때의 학술적 충격은 지금도 생생하다. 살리나스 계곡에서 불어오던 서늘하면서도 따스한 바람은, 스타인벡이 평생 고민했던 인간 존재의 이중적 속성을 온몸으로 느끼게 해주었다. 흥미롭게도 스타인벡은 이 소설을 쓰던 해 두 번째 이혼을 겪고 엘레인 스콧과 재혼했으며, 뉴욕에서 두 아들과 의붓딸과 함께 지내고 있었다. 고향 캘리포니아의 인간적인 공동체를 그리워하던 작가의 불안한 삶이, 이 작품 곳곳에 스민 양면성의 토양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양면성 — 전쟁 직후 한적해진 캐너리 로우 통조림 공장 거리, 황금빛 저녁 풍경

전쟁이 남긴 첫 번째 양면성 — 애국심과 상실 사이의 캐너리 로우

소설의 첫 장면부터 양면성은 또렷하다. 전쟁 기간 통제를 풀고 정박해 있던 물고기를 모조리 잡아 올린 통조림 공장들은 애국심이라는 명분을 앞세웠지만, 그 명분은 정작 사라진 물고기를 돌려주지 못했다. 전쟁은 끝났지만 캐너리 로우는 예전의 캐너리 로우가 아니다. 통조림 공장은 침묵하고, 사람들은 떠났으며, 살아남은 이들조차 이전과 같은 모습이 아니다.

식료품점 주인이었던 리 청(Lee Chong)은 사라지고, 조셉 앤 메리(Joseph and Mary Rivas)라는 새 얼굴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게이(Gay)는 런던에서 전사했고, 화이티 1호와 2호는 부상병으로 돌아왔으며, 잠든 채 세상을 떠난 도라 플러드(Dora Flood)는 베어 플래그(Bear Flag)를 언니 파우나(Fauna)에게 남겼다. 파우나는 매춘업과 자선사업을 같은 선상에 놓고 공공서비스라 부르는데, 이 한마디에도 양면성이 압축돼 있다. 워렌 프렌치(Warren French)는 이러한 파우나의 형상화를, 스타인벡이 평생 견지해 온 중산층 도덕에 대한 저항이 정점에 이른 사례로 읽었다. 합법과 불법, 존경과 경멸의 경계가 한 인물 안에서 이렇게 쉽게 무너진다는 것 자체가, 이 소설이 시작부터 던지는 질문이다.

스타인벡은 이 전쟁 이후의 풍경을 단순한 사회 변화로 그리지 않는다. 그는 공동체 전체가 느끼는 집단적 양면성을 묘사한다. 특히 Doc의 모습은 인상적이다. 위생병으로 군대에서 복무한 뒤 돌아온 그는 마음의 안정을 되찾지 못한다. 연구실은 낡았고, 예전의 삶은 사라졌다. 그는 계속 일하지만 만족하지 못한다. 스타인벡은 인간이 어느 순간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묻게 되는 질문을 Doc에게 부여한다. 내 삶은 무엇을 의미했는가? 바로 이 질문이 『달콤한 목요일』 전체를 떠받치는 첫 번째 양면성의 출발점이다.

두 번째 양면성 — Doc과 조셉 앤 메리, 정직과 그림자 사이

전쟁이 공동체 차원에서 드러낸 양면성이라면, 두 번째 양면성은 개인 차원, 곧 Doc이라는 인물 안에서 펼쳐진다. Doc은 정직과 합법을 삶의 원칙으로 여기는 인물이고, 조셉 앤 메리는 도박꾼이자 갱단 두목, 심지어 로스앤젤레스 시 공무원 신분으로 마리화나 밀매까지 손댄 전력을 지닌 인물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정반대이면서도 미묘하게 닮아 있고, 그 차이는 가벼운 바람에 흔들리는 모빌처럼 균형을 이룬다. 융의 개념으로 보면 조셉 앤 메리는 Doc의 그림자(shadow), 곧 의식이 억눌러 둔 또 다른 자아에 가깝다. 그림자는 추악하기만 한 존재가 아니라 인격의 살아 있는 일부이며, 함께 살아가야 할 대상이라고 융은 말한다.

흥미롭게도 이런 트릭스터적 양면성은 한국 고전 서사에도 낯설지 않다. 봉이 김선달이 사기와 의협을 동시에 지녔듯, 조셉 앤 메리 역시 불법 이주민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주는 한편 파우나의 베어 플래그를 가로채려 한다. 둘 다 법의 바깥에 있지만, 둘 다 공동체에 필요한 존재라는 점에서 도덕적 단죄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러나 정작 스타인벡 소설 속 많은 인물들과 달리, Doc은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이 아니다. 그는 교육받았고 지적이며 경제적으로도 완전히 빈곤하지 않다. 그럼에도 그는 깊은 고독을 경험한다. 필자는 이 점이 『달콤한 목요일』의 가장 현대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가난 때문에 외로운 것이 아니다. 사람이 없어서 외로운 것도 아니다. 자신의 삶이 충분했는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고독한 것이다. 선악을 가르는 경계가, 그리고 충족과 결핍을 가르는 경계가 생각보다 훨씬 얇다는 것, 그것이 스타인벡이 두 번째 양면성을 통해 말하려는 바다. 이 통찰은 『생쥐와 인간』(Of Mice and Men)에서부터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에 이르기까지, 스타인벡이 평생 천착해 온 외로움의 사회학과 정확히 만나는 지점이다.

세 번째 양면성 — Doc 내면에서 울리는 세 가지 목소리

이 두 인물의 대비가 바깥에서 본 Doc의 모습이라면, 세 번째 양면성은 그의 내면 그 자체로 들어간다. 3장과 9장에서 그는 동시에 울리는 세 개의 목소리를 듣는다. 사고하는 마음의 목소리, 곧 탑 보이스(top voice)는 작은 생물들의 신비를 노래하며 플랑크톤이 전 세계 생명체의 근원임을 인지하는 과학자의 시선이다. 느끼는 마음의 목소리, 미들 보이스(middle voice)는 작은 세계에 몰두함으로써 거대한 현실을 회피하려는 Doc의 나약함을 꼬집는다. 그리고 가장 깊은 골수에서 흘러나오는 로어 보이스(lower voice)는 그저 고독을 호소한다. 이는 프로이트의 자아와 초자아 구도와도 닮아 있지만, 융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대립이 아닌 통합을 궁극적 목표로 둔다는 점에서 결을 달리한다.

양면성 — 표본병이 놓인 해양생물학 연구소에서 홀로 생각에 잠긴 닥터의 모습

Thought is the evasion of feeling. You’re only walling up the leaking loneliness.
(생각은 감정의 회피일 뿐이다. 너는 그저 새어 나오는 외로움을 벽으로 가로막고 있을 뿐이다.)

이 짧은 문장에서 스타인벡이 단어 선택을 통해 드러내고자 한 것은, 의식적인 학문적 성취가 도리어 무의식의 깊은 고독을 은폐하는 방어기제로 작용하고 있다는 통찰이다. Doc은 이 지독한 고독을 해결하기 위해 남부 라호야(La Jolla)로 원정을 떠나 두족류 동물을 채집하며 돌파구를 찾으려 하지만, 내면의 근본적인 복합성(complex)은 그렇게 쉽게 해소되지 않는다. 채집망에 잡히는 것은 오징어이지만, 정작 그가 채집하지 못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다.

융이 말하는 자기(self), 즉 집단무의식의 원형은 의식되지 않은 채 잠재해 있다가 어떤 매개를 통해서만 표면으로 떠오른다. Doc에게 그 매개는 Suzy였다.

네 번째 양면성 — Suzy라는 치유의 역설

세 목소리의 불협화음 끝에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Suzy다. 『달콤한 목요일』을 단순한 로맨스 소설로 읽는 것은 위험하다. Suzy는 전형적인 구원자가 아니다. 그녀 역시 상처를 가진 인물이다. 바로 이 지점이 중요하다. 스타인벡은 완전한 사람이 불완전한 사람을 구원하는 이야기를 쓰지 않는다. 상처 입은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필자가 발표한 여러 스타인벡 논문에서도 반복적으로 강조한 부분이지만, 스타인벡의 인간주의는 영웅주의와 다르다. 그의 인물들은 결코 완벽하지 않다. 오히려 결함 때문에 서로에게 다가간다.

Suzy가 Doc에게 바란 것은 자신에게 모질게 하지 말고, 자신을 절실히 필요로 해 달라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권위가 아니라 어머니의 품을 원한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관계는 융이 말한 아니마(anima)와 아니무스(animus)의 성 역할이 뒤바뀐 형태로 나타난다. 헤이즐(Hazel)이 무심코 Doc의 팔을 부러뜨리는 사건은 역설적으로 그를 구원하는 문학적 반전이다. 팔이 부러져 스스로 운전할 수 없게 된 Doc은 비로소 자신의 결핍을 인정하고 Suzy에게 도움을 청한다.

Sure you can! I need you, Suzy. I need you to go with me.
(물론 할 수 있지! 난 네가 필요해, 수지. 나와 함께 가 주어야 해.)

이 외침은 Doc의 영혼 깊숙이 자리하던 고독의 장벽이 무너지고, 진정한 타자와의 연대가 실현되는 순간을 대변한다. 그들의 사랑은 이상적 사랑이 아니라 상호 치유의 과정이다. 네 번째 양면성, 곧 고독과 사랑의 양면성은 여기서 비로소 통합된다. 그러나 그 사랑은 낭만적 환상이 아니라, 서로의 결핍을 인정한 뒤에야 도달하는 성숙한 관계라는 점을 분명히 해 두어야 한다.

다섯 번째 양면성 — 공동체, 그리고 우주 속의 동시성

Doc과 Suzy의 사랑이 두 사람만의 사건이라면, 다섯 번째 양면성은 그 사랑을 떠받치는 공동체와 우주적 차원으로 시야를 넓힌다. 많은 비평가들은 『달콤한 목요일』을 스타인벡 후기 인간주의의 대표 작품으로 평가한다. 그 이유는 공동체가 수행하는 역할 때문이다. Mack과 친구들은 엉뚱하고 실수도 많다. 예컨대 그들은 Doc을 위해 어설픈 파티를 준비하며 늘 사고를 치지만, 그 서투름 자체가 애정의 증거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Doc을 포기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외로움을 개인 문제로 방치하지 않는다. 오늘날 한국 사회를 떠올려 보면 이 장면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현대인은 과거 어느 시대보다 많은 사람과 연결되어 있지만 동시에 더 깊은 고독을 경험한다. 스타인벡은 공동체를 통해 그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그 공동체는 완벽하지 않다. 오히려 서툴고 어설프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간적이다.

10장에서 Doc은 해변에서 한 노인을 만나는데, 그는 어젯밤 인어를 보았다고 말한다.

I saw a mermaid last night.
(어젯밤 인어를 보았다.)

반달과 안개, 황금빛으로 물든 바다, 그리고 해 질 녘에야 나타나 사라지는 신비로운 존재. 이 장면은 스타인벡의 처녀작 『황금의 잔』(Cup of Gold)에서 헨리 모건에게 달을 마시라 일러주던 멀린(Merlin)의 장면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데뷔작과 후기작이 같은 신화적 장치로 인물의 운명을 예고한다는 사실은, 스타인벡이 평생 하나의 세계관, 곧 개인이 문명의 억압을 넘어 자기 자신에 도달해야 한다는 믿음을 견지했음을 보여 준다. 융은 이런 우연의 일치를 동시성(synchronicity)이라 불렀고, 이를 통해 인간이 우주 속에서 결코 이방인이 아님을 증명한다고 했다. 스타인벡은 인간이 인간을 완전히 구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혼자 남겨두지는 않을 수 있다고 믿는다. 이 믿음이 『달콤한 목요일』 전체를 지탱하는 정서적 중심축이다.

양면성 — 황금빛 노을 속 해안도로를 함께 달리는 두 사람, 고독에서 사랑으로

제목은 달콤하다. 그러나 그 달콤함은 현실을 외면한 낙관주의가 아니다. 스타인벡은 다섯 가지 양면성, 곧 전쟁의 아이러니, Doc과 조셉 앤 메리의 그림자, 내면의 세 목소리, Suzy와의 치유, 공동체와 우주의 동시성을 충분히 통과한 뒤에야 희망에 도달한다. 『캐너리 로우』의 비극적 결말이 이 소설에서는 Doc의 구원으로 뒤집히지만, 그 이면에는 변함없이 외로움이라는 낮은 목소리가 흐른다. 웃음과 외로움, 정직과 사기, 의식과 무의식이 한 몸에 공존한다는 점에서, 『달콤한 목요일』은 스타인벡 문학의 양면성을 가장 농밀하게 응축한 작품이다. 스타인벡이 평생 추구한 것은 선악이나 행복과 불행의 이분법이 아니라, 그 둘이 한 사람 안에서 끊임없이 긴장하며 공존하는 인간의 진실이었다.

30년 동안 스타인벡을 연구하면서 필자는 이 작품을 읽을 때마다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인간은 완전해져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와 연결될 때 비로소 살아갈 힘을 얻는다. 그 진실을 읽어내는 일이야말로, 깊이 읽고 멀리 가는 문학 읽기의 본령이라 믿는다.

존 스타인벡 문학 전체를 한눈에 보려면 → 존 스타인벡 완전 가이드

내부 링크 추천:

  1. 『통조림 공장가』1편 — 우리는 왜 서로에게 빚을 지며 살아가는가?
  2. 컬리 부인이 악녀로 불린 3가지 이유 – 존 스타인벡 『생쥐와 인간』
  3. [존 스타인벡 깊이 읽기 ①] 짐 케이시가 목사를 그만둔 3가지 이유 — 『분노의 포도』 속 가장 불편한 질문
  4. 『에덴의 동쪽』 팀셸(Timshel) 3가지 의미 — 존 스타인벡이 말한 자유의지와 용서의 철학
  5. 2003년 살리나스 답사기 — 국립 스타인벡 센터를 가다

외부 링크 추천:

  1. National Steinbeck Center (steinbeck.org)
  2. The Martha Heasley Cox Center for Steinbeck Studies, San Jose State University
  3. Encyclopaedia Britannica — Carl Jung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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