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빈손으로도 다시 바다로 가는가? 『노인과 바다』가 건넨 3가지 대답

이른 새벽 다섯 시, 전주에서 약 1시간 거리에 있는 군산 비응항.
배가 방파제를 벗어나자 엔진 소리가 낮아지고, 사람들은 이상하게 말수가 줄어든다. 육지에서는 늘 확인해야 할 메시지가 있고 대답해야 할 질문이 있는데, 배가 물살을 가르기 시작하면 세상은 물빛과 하늘빛 두 가지로만 남는다. 바다는 우리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다만 흔들릴 뿐이다. 뒤로 밀려나는 하얀 항적을 바라보다가 문득 모자를 만졌다. Western DAD. 딸과 아들이 다녔던 캐나다 웨스턴 대학의 기념품 가게에서 아이들이 사주었던 모자이다. 가족은 지구 반대편 Ontario에 있고, 아빠는 서해 한가운데 있다. 그 새벽 배 위에서 나는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The Old Man and the Sea)를 생각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84일 동안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하고도 85일째 아침에 다시 바다로 나간 한 노인을.
노인과 바다, 84일의 빈손에도 다시 나가는 아침
『노인과 바다』의 첫 문장은 냉정하다. 노인 산티아고는 84일째 고기를 잡지 못했고, 마을 사람들은 그를 salao라 부른다. 그냥 unlucky가 아니라 the worst form of unlucky, 불운 중에서도 가장 깊은 불운. 헤밍웨이가 굳이 스페인어 단어 하나를 박아 넣은 이유를, 나는 오랫동안 강의실에서 설명해 왔다. 그런데 활자로만 박혀 있던 이 박제된 문장은 칠판 앞에서가 아니라 입질 없는 배 위에서 비로소 살갗을 뚫고 들어와 뜨거운 피로 흐르기 시작했다.
산티아고에게는 소년 마놀린이 있었다. 부모가 저 노인 배는 글렀다며 아이를 다른 배로 보냈는데도, 소년은 저녁마다 노인의 낚싯줄과 작살을 함께 나른다. 1952년에 출간되어 헤밍웨이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긴 이 얇은 소설이 지금도 읽히는 이유는 청새치와의 사투 때문만이 아니다. 빈손으로 돌아온 사람 곁에 아무 말 없이 앉아 주는 존재, 그리고 빈손인 채로도 다음 날 그물을 손질하는 사람의 뒷모습 때문이다.
He was an old man who fished alone in a skiff in the Gulf Stream.
멕시코 만류에서 조각배를 타고 홀로 고기를 잡는 노인이었다.
『노인과 바다』의 이 첫 문장에서 내가 매번 걸려 넘어지는 단어는 alone이다. 혼자 낚시하는 사람은 안다. 그 단어가 외로움이 아니라 하나의 자세라는 것을.

입질 없는 날의 철학, 기다림은 낭비가 아니다
낚시의 시간은 이상하게 흐른다. 채비를 내리고, 초릿대 끝을 바라보고, 파도의 간격을 센다. 열 시간 배를 타고 손맛은 삼십 분이면 많은 편이다. 효율로 따지면 세상에서 가장 수지가 안 맞는 취미다. 그런데 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는 그 비효율의 시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Every day is a new day. It is better to be lucky. But I would rather be exact. Then when luck comes you are ready.
매일이 새로운 날이지. 운이 좋으면 더 좋고. 하지만 나는 정확한 편을 택하겠어. 그래야 운이 왔을 때 준비되어 있으니까.
다른 어부들이 대충 줄을 흘려보낼 때도 노인은 자신의 낚싯줄을 정확하게 수직으로 내리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바다라는 통제할 수 없는 운명 앞에서 그가 지킬 수 있었던 유일한 영역, 과정의 정확성. 나는 이것이 노인과 바다가 말하는 기다림의 윤리라고 생각한다. 기다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아니라, 무언가가 왔을 때 놓치지 않을 몸을 만드는 시간이다.
그래서 낚시는 바다에 도착하기 전부터 시작된다. 식탁 위에 릴을 늘어놓고 줄을 감고, 바늘 끝을 확인하고, 어제의 실패를 오늘의 채비에 반영한다. 잡을지 못 잡을지도 모르는데 이미 많은 것을 준비하는 일. 남이 보면 조금 우습겠지만, 삶의 중요한 일들은 대개 그렇다. 확실한 보상이 있어서 하는 일이 아니라, 하지 않으면 내가 나답지 않아지는 일이 있다.

헤밍웨이의 초기 단편 「두 개의 심장을 가진 큰 강」(“Big Two-Hearted River”)에는 전쟁에서 돌아온 닉 아담스가 홀로 강가로 들어가 송어 낚시 채비를 차리는 장면이 나온다. 소설 어디에도 전쟁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한 줄도 없다. 문면에 드러나는 것은 빙산의 8분의 1일 뿐, 나머지 8분의 7은 수면 아래 가라앉혀 두는 헤밍웨이의 빙산 이론이 여기서 완성된다. 텐트를 치고, 조심스럽게 미끼를 꿰고, 흐르는 물에 줄을 던지는 단순하고 반복적인 행위 속에서 우리는 수면 아래 묵직하게 가라앉은 상처와, 그것을 필사적으로 누르는 치유의 몸부림을 읽는다. 배달 오토바이의 핸들을 잡던 밤에도, 논문이 몇 달째 진척이 없던 계절에도, 나를 버티게 한 것은 대단한 성취가 아니라 이 감각이었다. 오늘은 입질이 없었지만, 내 채비는 정확했다는 감각.
빈 쿨러를 들고 항구로 돌아오는 저녁이 있다. 물고기를 기다린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내 마음이 가라앉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소로가 월든 호수에서 말한 대로 시간은 내가 낚시를 드리우는 강물일 뿐이어서, 고기를 못 잡은 날에도 강물은 나를 통과해 흘렀다. 그것으로 되었다고, 배 위의 노인과 바다는 말해 준다.

노인과 바다가 차린 만찬, 직접 뜬 회 한 접시
집으로 돌아와 우럭의 비늘을 치고 포를 뜬다. 서툰 칼질이라 횟집처럼 얇게 썰리지는 않는다. 두툼하고 못생긴 회 한 접시를 책장 앞 테이블에 놓는다. 상추 몇 장, 마늘, 풋고추, 그리고 소주병들. 책장에는 삼십 년을 함께 산 스타인벡 연구서들이 꽂혀 있고, 그 앞에서 나는 오늘 바다가 내준 것을 함께 출조했던 후배 교수와 먹는다.
혼자 먹는 밥이 처량하다고들 한다. 그러나 산티아고를 보라. 그는 청새치의 살점을 씹으며 고기에게 말을 건다. 형제여, 미안하다, 그러나 나는 너를 먹어야 산다. 고기를 잡는 행위 안에 존중이 있고, 생명을 얻는 일 안에 미안함이 있다. 바다 위에서 인간은 강자가 아니라 잠시 허락받은 손님이라는 것을, 노인과 바다는 안다. 자기가 잡은 것을 자기 손으로 손질해 먹는 일에는 그래서 어떤 원초적인 정직함이 있다. 회 한 점은 바다에서 식탁으로 건너온 시간이다. 새벽의 출발과 배의 흔들림, 손끝에 전해진 미세한 입질과 서툰 칼질까지, 그 모든 것이 이 못생긴 한 접시에 통째로 담겨 있다.
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
인간은 파멸할 수는 있어도 패배하지는 않는다.
『노인과 바다』의 이 유명한 문장은 상어 떼에게 청새치를 다 뜯기고 뼈만 끌고 돌아오는 노인의 것이다. 결과만 보면 완전한 실패다. 그러나 헤밍웨이는 그 실패의 밤에 노인을 침대에 눕히고, 사자 꿈을 꾸게 한다. 젊은 날 아프리카 해변에서 보았던, 생명력과 용맹함의 상징인 그 사자들을. 파멸과 패배를 가르는 것은 쿨러의 무게가 아니라, 내일 새벽 다시 돛을 올릴 수 있는 지치지 않는 사자의 심장을 품고 있는가의 문제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바다로 간다
거실 벽에는 캐나다 킹스톤(Kingston) 항에서 찍은 가족사진이 걸려 있다. 아내와 딸, 그리고 아들 품에 안긴 모카. 그 액자 아래에 낚시 패턴마다 각각 다른 종류의 낚싯대들이 세워져 있다. 누가 보면 우습다고 할 배치다. 그러나 나에게 이 벽은 정직하다. 그리움과 기다림이 한 벽에 나란히 서 있는 것. 낚싯대는 결국 고기를 기다리는 도구가 아니라, 시간을 견디는 도구인지도 모른다.

『노인과 바다』가 건넨 대답은 결국 세 가지였다. 빈손은 불명예가 아니라는 것. 기다림은 낭비가 아니라 준비라는 것. 그리고 파멸과 패배는 다른 단어라는 것. 중년 이후의 삶도 조금은 낚시와 닮았다. 예전처럼 빠르게 증명할 수 없고, 세상도 쉽게 박수쳐 주지 않는다. 어느 날은 풍성하고, 어느 날은 빈손이다. 그러나 84일 빈손이었던 노인이 85일째 새벽에 돛을 올렸듯, 나는 다음 물때표를 들여다본다. 방학이 오면 나의 바다는 잠시 캐나다 런던의 템즈강으로 바뀔 것이다.
바다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다시 바다로 가는가. 아마도 바다가 무엇을 주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곳에서 내 조급함을 보고, 내 욕심을 보고, 내 작은 용기를 본다. 고기를 잡으러 갔다가, 때로는 나 자신을 조금 건져 올리는 일. 그 질문을 들고 다음 글에서는 스타인벡의 배에 오르려 한다. 그가 절친한 해양생물학자와 함께 캘리포니아 만을 항해하며 쓴 『코르테즈 해 항해일지』(The Log from the Sea of Cortez)에는, 입질 없는 날의 바다를 읽는 또 다른 눈이 있다.
오늘도 어딘가에서 초릿대 끝을 바라보고 있을 당신에게, 산티아고의 새벽을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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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 추천: Nobel Prize 공식 Hemingway 페이지 (nobelprize.org/prizes/literature/1954/hemingway) — 1952년 출간·노벨상 언급 부분
시리즈 내비게이션: 낚싯대 위의 인문학 시리즈
1편. 우리는 왜 빈손으로도 다시 바다로 가는가? 『노인과 바다』 (현재 글)
2편. 바다는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는다 — 『코르테즈 해 항해일지』 (예정)
3편. 낚싯대는 결국 사람을 낚는다 — 『흐르는 강물처럼』 (예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