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사노 토르티야 플랫 몬테레이 해안 언덕 스타인벡 공동체 풍경

파이사노란 누구인가? 존 스타인벡이 그린 3가지 인간 유형

파이사노(paisano)는 스타인벡 문학에서 가장 오해받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존 스타인벡 문학에서는 파이사노가 단순한 주변부 인물이 아니라, 문명의 허위와 물질주의의 폭력성을 폭로하는 핵심적 인간 유형으로 깊이 있게 다루어집니다. 이 글에서 이 3가지 인간 유형이 어떻게 1930년대 미국 사회를 향한 날카로운 문학적 비판으로 기능하는지를 정리했습니다.

1935년에 발표된 『토르티야 플랫』(Tortilla Flat)은 흔히 스타인벡의 초기 유머 소설 정도로 가볍게 읽히곤 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이후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로 이어지는 스타인벡의 인간 이해와 공동체 철학의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통조림 공장가』(Cannery Row)이나 『에덴의 동쪽』(East of Eden)에서 반복되는 공동체 철학의 씨앗이 바로 이 작품 속 파이사노들의 삶 속에 이미 뿌려져 있다.

2003년, 필자는 연구년을 맞아 스타인벡의 고향인 캘리포니아주 살리나스(Salinas)를 방문했다. 국립 스타인벡 센터(National Steinbeck Center)에서 방대한 1차 자료를 검토하고, 산호세 주립대학교의 마사 히즐리 콕스 스타인벡 센터(The Martha Heasley Cox Center for Steinbeck Studies)에서 방문교수로 생활하던 그 시절, 필자는 몬테레이(Monterey)의 언덕을 직접 걸으며 파이사노들이 살았던 토르티야 플랫 지역을 눈으로 확인했다. 전기도, 아스팔트도 없는 그 언덕의 풍경 앞에서 필자는 오랫동안 멈춰 섰다. 『토르티야 플랫』을 처음 읽었을 때 느꼈던 당혹감 — “이 작품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가?” — 이 비로소 풀리는 순간이었다. 파이사노들의 삶은 게으름이 아니라, 문명이 닿지 않은 인간 본래의 리듬이었다.

스타인벡 토르티야 플랫 파이사노 거주지 몬테레이 언덕 풍경

파이사노란 누구인가 — 스타인벡의 정의와 그 함의

파이사노는 스페인인, 인디언, 멕시코인, 코카서스 혼혈로 이루어진 집단으로, 캘리포니아 몬테레이 언덕에서 수백 년을 살아온 사람들이다. 스타인벡은 작품 서문에서 이들을 이렇게 소개한다.

“The paisanos are clean of commercialism, free of the complicated systems of America business, and, having nothing that can be stolen, exploited, or mortgaged, that system has not attacked them very vigorously.”
(파이사노들은 상업주의에 물들지 않았고, 미국의 복잡한 상업 기구와도 인연이 없으며, 도적맞을 것도 착취당할 것도 저당 잡힐 것도 없으므로, 그 기구들에 의해 심각한 타격을 받지 않는다.)

국립 스타인벡 센터(National Steinbeck Center)는 파이사노들의 실제 거주 지역인 살리나스에 위치하며, 스타인벡의 1차 자료를 가장 방대하게 소장하고 있다. 이 서문은 단순한 인물 소개가 아니다. 스타인벡은 파이사노를 자본주의 시스템의 바깥에 존재하는 인간으로 정의함으로써, 역설적으로 그 시스템 내부의 폭력성을 드러낸다. 그들은 소유하지 않기에 착취당하지 않는다. 그들이 누리는 자유는 빈곤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물질문명에 대한 가장 원초적인 저항이기도 하다.

“No, when you speak of Danny’s house you are understood to mean a unit of which the parts are men.”
(대니의 집은 단순한 집이 아니라 인간들이 모여 이루어진 하나의 공동체였다.)

즉, 이 공동체에서 집은 부동산이 아니라 관계의 상징이다. 스타인벡은 대니와 친구들을 아서 왕의 원탁기사들과 의도적으로 비교하며, 이 가난한 공동체에 서사적 품격을 부여한다. 국내 학계에서는 오랫동안 파이사노를 부랑자나 거지떼로 규정해 왔다. 그러나 이는 파이사노들이 백인 주류 사회에 의해 역사적으로 배제된 치카노(Chicano)의 선조라는 현실을 외면한 해석이다. 그들의 삶은 선택된 자유가 아니라 구조화된 배제의 결과였으며, 스타인벡은 바로 그 지점에서 1930년대 미국 사회를 향한 풍자의 날을 세운다.

파이사노의 3가지 인간 유형 — 대니, 필론, 해적

『토르티야 플랫』의 이 공동체는 단일하지 않다. 스타인벡은 대니(Danny), 필론(Pilón), 해적(El Pirata)이라는 세 인물을 통해 이들의 다층적 인간 유형을 조각한다.

첫째, 대니(Danny)는 파이사노 공동체의 구심점이다. 1차 대전 후 귀환한 그는 할아버지로부터 두 채의 집을 유산으로 물려받는다. 이 순간이 비극의 씨앗이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던 대니는 집을 갖는 순간 재산이라는 책임의 무게에 짓눌리기 시작한다. 스타인벡 비평의 권위자인 워런 프렌치(Warren French)가 지적하듯, 소설의 결말은 이 소유의 순간에 이미 예시되어 있다.

“Pilon noticed that the worry of property was settling on Danny’s face. No more in life would that face be free of care.”
(필론은 재산에 대한 걱정이 대니의 얼굴에 내려앉는 것을 알아챘다. 그의 얼굴은 이제 결코 근심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었다.)

스타인벡에게 소유는 자유의 확대가 아니라 자유의 상실이다. 집, 즉 소유의 상징은 대니를 해방시키는 대신 감옥으로 변한다. 결국 그는 숲으로 도주하고, 마지막 파티에서 추락사한다. 공동체의 집은 그 후 화재로 소실되고 공동체도 해체된다.

둘째, 필론(Pilón)은 파이사노 공동체의 철학자다. 현실주의의 저주(the curse of realism)를 짊어진 그는 친구들의 낙관주의에 때로 균열을 낸다. Pablo와 나누는 다음 대화는 파이사노의 세계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If all the dew were diamonds,” Pablo said, “We would be very rich. We would be drunk all our lives.” But Pilon added, “Everybody would have too many diamonds. There would be no price for them, but wine always costs money.”
(파블로: “이슬이 모두 다이아몬드라면 우리는 부자가 될 텐데. 평생 취해 살 수 있을 거야.” / 필론: “그러면 다이아몬드가 너무 많아서 값이 없어질 거야. 그래도 술은 항상 돈이 든다고.”)

이 짧은 교환에서 이들의 비목적론적 사유가 압축된다. 그들의 욕망은 축적이 아니라 현재의 충족이며, 내일에 대한 계획 없이 오늘을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다.

셋째, 해적(El Pirata)은 가장 원시적인 파이사노다. 그는 닭장에서 개 다섯 마리와 함께 살며, 매일 장작을 팔아 25센트씩 모은다. 해적은 오래전 죽은 개를 위해 성 프란시스코에게 금 촛대를 바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한 푼도 쓰지 않은 것이었다. 이 돈주머니는 결국 공동체 전체의 우정의 상징이자 신뢰의 거점으로 변모한다. 그들에게 화폐는 교환가치가 아니라 공동체적 결속의 매개로 기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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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사노의 삶이 드러내는 원시주의와 물질문명 비판

스타인벡의 원시주의(primitivism)는 낭만적 도피가 아니다. 문학 용어 사전의 권위자 M.H. 에이브람스(M.H. Abrams)의 정의를 빌리면, 원시주의자란 인간의 이성과 제도보다 자연적인 것, 제도 이전의 것을 더 가치 있게 여기는 이들이다. 스타인벡은 파이사노들을 통해 캘리포니아의 원시적 인간성을 복원하려 했다.

스타인벡은 파이사노들을 통해 캘리포니아의 원시적 인간성을 복원하려 했다. 산호세 주립대학교의 마사 히즐리 콕스 스타인벡 센터(The Martha Heasley Cox Center for Steinbeck Studies)에서도 관련 아카이브를 온라인으로 일부 제공하고 있다.

이 공동체는 구조적으로 반자본주의적이다.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고 공동소유를 지향하며, 기본적인 음식과 술을 얻기 위해서만 노동하고 나머지 시간은 우정과 유머 속에서 산다. 집세를 내겠다고 약속하지만 그 약속은 단 한 번도 지켜지지 않으며, 오히려 집세를 구하러 나갔다가 와인을 사서 함께 마셔버리는 것이 그들의 방식이다. 이 게으름은 프로테스탄트 노동 윤리에 대한 의식적 위반이다.

세뇨라 테레시나 코르테스(Señora Teresina Cortez) 집안의 일화는 이 점을 명징하게 보여준다. 콩 흉년으로 8명의 아이들이 굶주릴 위기에 처하자, 그들은 공동체적 부조의 정신으로 콩 자루를 구해 문앞에 놓고 간다. 반면 학교 간호 교사는 아이들이 매 끼니 토르티야와 콩만 먹는다는 사실에 경악한다. 이 두 태도의 충돌은 문화적 차이를 넘어 인종주의적 편견의 민낯을 드러낸다.

필자가 강의실에서 이 장면을 설명하면 학생들은 처음에 웃음을 터뜨린다. 그런데 잠시 후 교실이 조용해지는 순간이 온다. 코미디처럼 보이는 이 장면이 실은 1930년대 미국의 인종주의적 시선을 가장 정확하게 해부한 서사임을 학생들 스스로 직감하는 것이다. 그 침묵이 필자에게는 문학의 힘을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파이사노 공동체의 해체 — 비목적론적 삶의 불가능성과 그 문학적 의미

파이사노의 삶은 아름답지만 지속 불가능하다. 이 작품은 비목적론적 삶의 찬가가 아니라, 그 삶의 불가능성에 대한 비가(悲歌)다.

“Who will fight? Is there no one left in the world who is not afraid?”
(싸울 자가 없느냐? 세상에 두렵지 않은 자가 없단 말이냐?)

아무도 응답하지 않자 그는 문 밖으로 나가고, 결국 계곡 아래로 추락해 죽는다. 워런 프렌치는 이 적(Enemy)의 정체를 신이나 운명, 혹은 자기 내면에 깃든 문명의 망령으로 해석한다. 문명은 결국 한 인간의 성격을 분열시키며, 그 분열을 끝까지 거부한 유일한 파이사노가 대니였고, 그래서 그는 쓰러졌다.

그러나 스타인벡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이 실패를 통해 그는 독자에게 묻는다. 과연 문명이 옳은가? 소유가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가? 그들의 삶이 비록 파국으로 끝났다 해도, 그들이 보여준 공동체의 온기 — 해적의 돈을 함께 지키던 연대감, 굶주린 이웃에게 몰래 콩 자루를 날라다 주던 조용한 사랑 — 은 현대 물질문명이 잃어버린 가장 인간적인 것의 기억으로 남는다.

파이사노 공동체 대니의 집 화재 스타인벡 토르티야 플랫 결말

파이사노는 스타인벡이 발명한 문학적 인간 유형이 아니다. 그들은 실재했고, 수백 년 동안 그 언덕에서 살아왔다. 스타인벡은 그들의 삶 속에서 원시적 인간성의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포착했다. 그 빛은 우정과 공동체와 현재의 충일함이며, 그림자는 자본주의 문명이 그 삶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구조적 비극이다.

『토르티야 플랫』은 희극의 외피를 입은 비극이다. 과연 누가 더 인간다운 삶을 살고 있는가? 이 질문이야말로 이 작품을 읽는 핵심이다. 그리고 그 비극의 중심에는 언제나 파이사노 — 문명이 끝나는 곳에서 인간이 시작되는 곳을 가리키는 존재들 — 가 있다. 몬테레이의 그 언덕을 직접 걸어보고 나서야, 필자는 비로소 이 작품이 얼마나 정직한 책인지를 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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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국립 스타인벡 센터(National Steinbeck Center) 공식 사이트 https://www.steinbeck.org
마사 히즐리 콕스 스타인벡 센터(The Martha Heasley Cox Center for Steinbeck Studies) — 산호세 주립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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