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에서 우리는 왜 철학자가 되는가 — 토머스 울프와 3개의 경계에서

공항은 이동의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오래된 사진 몇 장을 다시 들여다보다가, 그 생각이 조금 흔들렸다. 공항은 이동보다 시간을 더 많이 담아내는 장소였다.
얼마 전 페이스북이 오래된 기억을 꺼내 보여줬다. 2013년 6월 28일, 인천공항. 그리고 2015년 6월 26일, 하네다공항(羽田空港). 페이스북이 하필 이 날짜들을 기억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나는 매년 여름방학이 시작되면 성적 처리를 마친 뒤 6월 25일 무렵에 출국했고, 겨울방학에는 어김없이 12월 24일에 출국했다. 크리스마스이브. 가족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위해 고른 날짜였다. 알고리즘은 그 패턴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보다 더 정확하게. 두 장의 사진 속에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두 곳 모두 공항이었고, 나는 두 곳 모두에서 캐나다행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그 사진들을 다시 보면서, 비행기보다 그 시간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떠오른 작품이 토머스 울프(Thomas Wolfe)의 『다시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You Can’t Go Home Again)였다.

공항이라는 경계 — 어느 세계에도 속하지 않는 자리
공항은 묘한 공간이다. 입국도 출국도 아닌 곳. 이미 한국을 떠났지만 아직 캐나다에 도착하지 않은 상태. 문학에서는 이런 상태를 경계(liminality)라고 부른다. 어느 세계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은 중간 지대.
프랑스 인류학자 마르크 오제(Marc Augé)는 이런 공간을 비장소(non-place)라고 불렀다. 역사도, 관계도, 정체성도 잠시 유예된 채 오직 이동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공간. 공항의 대기실에 앉는 순간, 우리는 누군가의 가족이자 직장 동료이자 사회적 직함으로 규정되던 일상의 역할에서 벗어나 여권 번호와 탑승권 한 장으로 환원되는 순수한 개인이 된다.
2013년 6월, 인천공항 식당에서 혼자 육계장을 먹었다. 빨간 국물, 밥 한 공기, 창밖의 대한항공 비행기. 그 사진을 13년 만에 다시 보는 순간, 이상하게도 밥 냄새가 났다. 기억이란 그런 것이다. 사진은 눈으로 보지만, 진짜 기억은 코와 혀로 온다.
출발 전 마지막으로 먹는 한국 밥 한 끼. 그것이 일종의 의식이었는지, 나도 그때는 몰랐다.

울프의 명제 — 집으로는 정말 돌아갈 수 없는가
토머스 울프의 소설 제목은 그 자체로 하나의 철학적 명제가 된다.
“You can’t go home again.”
흔히 이 문장을 고향 상실의 감상으로 읽는다. 하지만 울프가 말하려 했던 것은 더 정확히는 이것이다. 집이 변한 것이 아니라, 돌아가는 사람이 이미 변해 있다. 우리가 기억하는 집은, 우리가 떠나는 순간 이미 존재를 멈춘다.
소설의 주인공 조지 웨버(George Webber)는 고향 마을을 소설로 써서 유명해졌다가, 바로 그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고향 사람들이 글 속에서 자신을 알아봤기 때문이다. 집을 사랑했기 때문에 집을 잃은 아이러니. 글쓰기가 귀환의 길을 막아버린 역설.
울프는 소설에서 이렇게 적었다.
“You can’t go back home to the escape of time and change.”
(시간과 변화의 도피처로서의 고향으로는 절대 되돌아갈 수 없다.)
공항도 마찬가지다. 2013년의 인천공항과 오늘의 인천공항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활주로에는 여전히 비행기가 서 있고, 전광판에는 출발 시간이 표시된다. 변한 것은 공항이 아니라 그곳을 바라보는 사람이다.
공항이라는 비장소는 일상의 역할과 관계를 일시 정지시키고, 우리에게 날것의 개인으로 서 있을 것을 강제한다. 그 텅 빈 자리에서 사유는 시작된다.
스타인벡의 반론 — 그래도 떠나는 사람

울프가 “돌아갈 수 없다”고 했다면, 존 스타인벡(John Steinbeck)은 반대로 했다.
1960년, 스타인벡은 58세에 픽업트럭을 몰고 미국 전역을 횡단하기로 결심했다. 푸들 찰리를 조수석에 태우고. 그 여정을 담은 것이 『찰리와 함께한 여행』(Travels with Charley in Search of America)이다.
(→ 관련 글: 찰리와 함께한 여행 – 58세의 스타인벡이 길을 나선 이유)
스타인벡은 그 여행에서 이렇게 말했다.
“A journey is a person in itself.”
(여행은 그 자체로 하나의 인격이다.)
처음 이 문장을 읽었을 때는 여행의 낭만을 말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여러 번 다시 읽으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여행은 목적지를 향한 직선이 아니라, 사람을 조금씩 다른 사람으로 바꾸는 긴 과정이었다. 그래서 여행이 끝난 뒤에도 우리는 출발 전의 사람이 아니다.
비행기 안 창가 자리. 마스크를 쓰고 혼자 앉아 이륙을 기다리는 그 시간. 공항에서 비행기 안으로 공간이 바뀌어도, 경계의 느낌은 사라지지 않는다. 활주로가 물러나기 시작할 때, 나는 언제나 같은 생각을 한다. 지금 나는 무언가를 떠나고 있는가, 아니면 무언가를 향해 가고 있는가.
울프가 상실을 직시했고, 스타인벡은 그 상실 앞에서도 핸들을 잡았다. 어느 쪽이 옳은가. 나는 그 질문을 들고 2015년 여름 하네다 공항 환승 대기실 창가에 앉아 있었다.
하네다 대기실 — 집도 아니고 길도 아닌 자리

2015년 6월 26일. 인천에서 출발해 하네다를 경유해 캐나다로 가는 연결편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 5시 40분 출발. 창밖에는 에바항공 비행기가 흐린 하늘 아래 조용히 서 있었다. 그날 페이스북에 영어로 짧게 적었다.
“Waiting for another flight…to Canada…my departure time is 5:40p.m. ㅠㅠㅠㅠ — 羽田空港에서.”
그 게시물에 댓글이 36개 달렸다. 그 “ㅠㅠㅠㅠ”에 무엇이 담겨 있었는지, 댓글을 달아준 스물한 명은 알았을까.
한국도 아니고 캐나다도 아닌, 일본 공항 환승 구역. 어느 나라에도 완전히 도착하지 않은 상태. 공항의 환승 구역은 경계 중의 경계다. 그 부유하는 공간에서, 울프의 명제와 스타인벡의 여정이 동시에 떠올랐다. 집을 떠나온 것인지, 집으로 가고 있는 것인지조차 불분명한 자리.
T. S. 엘리엇(T. S. Eliot)은 「네 개의 사중주」(“Four Quartets”)에서 이렇게 썼다.
“We shall not cease from exploration,
And the end of all our exploring
Will be to arrive where we started
And know the place for the first time.”
(우리는 탐험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탐험의 끝에서
처음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와
비로소 그곳을 처음 보는 것처럼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울프가 겹쳐진다. 결국 우리는 같은 장소로 돌아온다. 그러나 돌아온 사람은 예전의 사람이 아니다. 같은 공항도 처음 보는 풍경처럼 낯설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공항 사진이 세월이 지날수록 더 특별해지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사진 속에는 단지 비행기 한 대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시절에는 아직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 아직 읽지 못했던 책들, 아직 경험하지 못했던 기쁨과 상실. 그 모든 미래가 한 장의 사진 안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다.
(→ 관련 글: 집이란 무엇인가? — 여산 휴게소를 지날 때마다 몸이 먼저 대답하는 3가지 감각)
울프가 정말 말하고 싶었던 것

다시 울프의 문장으로 돌아간다.
“You can’t go home again.”
이 말은 절망이 아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읽는다. 이것은 오히려 일종의 해방 선언이다. 집이 변한다는 것을, 내가 기억하는 집은 이미 사라졌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 역설적으로 우리는 자유로워진다. 돌아갈 수 없는 집에 붙들려 있을 필요가 없어지니까.
페이스북은 오래된 사진을 추억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문학은 그것을 시간이라고 부른다. 2013년의 인천공항도, 2015년의 하네다공항도 이제는 과거의 장소가 아니다. 그곳은 한 사람이 조금씩 다른 사람이 되어 가던 시간을 조용히 품고 있는 공간이다.
공항 야경이 내 얼굴 뒤로 반짝이던 그 밤, 나는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 사진을 다시 보면서 안다. 나는 비행기가 아니라 무언가 다른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확히 무엇인지는 아직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이 공항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 끝내 알 수 없는 장소.
토머스 울프가 말한 “돌아갈 수 없는 집”은 어쩌면 특정한 장소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어제의 나였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떠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어딘가를 향해 계속 걷는 것. 스타인벡이 58세에 트럭을 몰았던 것처럼. 엘리엇이 말한 것처럼, 탐험의 끝에서 우리는 처음 출발했던 곳을 비로소 처음 보는 눈으로 이해하게 된다.
공항은 그 깨달음이 가장 선명하게 찾아오는 장소다. 비행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변해버린 자신을 처음으로 마주하는 장소.
울프는 옳았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도 짐을 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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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 추천
Thomas Wolfe — Goodreads (You Can’t Go Home Again)
T. S. Eliot, Four Quartets — Poetry Foundation
Martha Heasley Cox Center for Steinbeck Studies, San Jose State Universit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