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스타인벡의 『핍핀 4세의 짧은 치세』- 왜 그는 가장 웃긴 소설로 가장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을까
스타인벡이 웃기려고 쓴 소설은 아니었다 — 『핍핀 4세의 짧은 치세』가 던지는 진짜 질문
흔히 존 스타인벡(John Steinbeck)은 무거운 작가라고 알려져 있다.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의 처절한 이주 노동자들, 『생쥐와 인간』(Of Mice and Men)의 부서진 꿈, 『에덴의 동쪽』(East of Eden)의 장대한 선악의 대결. 이것이 우리가 기억하는 스타인벡이다. 그런데 1957년, 노벨문학상을 받기 5년 전, 그는 돌연 전혀 다른 소설을 발표했다. 제목은 『핍핀 4세의 짧은 치세: 하나의 꾸며낸 이야기』(The Short Reign of Pippin IV: A Fabrication). 스타인벡의 유일한 정치 풍자 소설이자, 한국에서는 KCI 논문 한 편 없을 만큼 거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다. 그러나 이 소설을 읽고 나면 한 가지가 분명해진다. 스타인벡은 웃기려고 이 소설을 쓴 것이 아니었다.
같은 시기 스타인벡은 트럭을 몰고 미국을 횡단하며 또 다른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그 여정이 궁금하다면 [찰리와 함께한 여행 — 존 스타인벡이 58세에 트럭을 몬 이유]를 함께 읽어보길 권한다.”
핍핀 4세는 스타인벡이 권위, 상징, 그리고 민주주의의 피로감에 대해 던진 가장 날카로운 질문이다. 이 글에서 그 질문의 정체를 추적한다.

핍핀 4세란 무엇인가 — “꾸며낸 이야기”라는 부제의 의미
1957년 출판된 『핍핀 4세』는 스타인벡의 장편소설 목록에서 가장 짧고, 가장 가볍게 읽히며, 그래서 가장 많이 오해받는 작품이다. 이 소설이 탄생한 1957년은 역사적으로도 특별한 해였다. 냉전이 절정에 달했고, 프랑스는 제4공화국의 극심한 정치적 혼란 속에 있었다. 정부가 수시로 교체되고, 좌파와 우파가 끝없이 충돌하며, 의회는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실제로 프랑스 제4공화국은 1946년부터 1958년까지 12년 동안 무려 21번의 내각 교체를 겪었다. 스타인벡은 이 현실을 바라보며 생각했을 것이다. “이 혼란이 극에 달하면 사람들은 결국 무엇을 원하게 되는가?”
줄거리는 이렇다. 1950년대 파리에 사는 54세의 아마추어 천문학자 핍핀 에리스탈(Pippin Héristal)은 어느 날 갑자기 프랑스의 왕으로 선출된다. 이유는 황당하다. 정치적 교착 상태에 빠진 프랑스 정치인들이 “차라리 왕정을 복고하자”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그것도 공산주의자들이 타도할 군주제가 필요했기 때문에. 핍핀은 샤를마뉴 대제의 후손이라는 이유만으로 왕좌에 앉힌다. 그는 왕이 되기 싫다. 망원경 앞으로 돌아가고 싶다. 하지만 시대가 그를 놔주지 않는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소설의 부제다. 스타인벡은 이 작품을 “A Fabrication”, 즉 “꾸며낸 이야기”라고 불렀다. 이것은 단순한 겸손이 아니다. 그레이엄 그린(Graham Greene)이 자신의 작품을 “소설”과 “오락물”로 구분했듯, 스타인벡도 이 작품이 일반 소설과는 다른 층위에 있음을 처음부터 선언한 것이다. “꾸며낸 이야기”란 곧 허구이고, 허구란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다. 스타인벡이 핍핀의 이야기를 “fabrication”이라 부른 순간, 그는 독자에게 묻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진짜라고 믿는 왕권, 국가, 민주주의는 과연 fabrication이 아닌가?
스타인벡은 30년 이상 가르쳐온 작가이지만, 이 작품을 처음 접했을 때의 당혹감은 지금도 생생하다. 『분노의 포도』를 쓴 손이 이렇게 가볍고 유머러스한 소설을 썼다는 사실이 처음엔 낯설었다. 하지만 읽을수록 분명해졌다. 이 소설의 웃음 뒤에는 스타인벡 특유의 냉철한 시선이 숨어 있었다.

왕관은 사람을 바꾸는가 — Role creates identity
핍핀 4세 분석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왕이 된 핍핀이 점점 왕처럼 행동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처음에 그는 왕 역할이 싫어서 망원경 앞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궁전의 외풍, 프라이버시의 상실 — 이 모든 것이 그를 괴롭힌다.
그를 둘러싼 인물들도 흥미롭다. 아내 마리(Marie)는 사회적 야망이 강해 왕비 자리를 즐긴다. 딸 클로틸드(Clotilde)는 캘리포니아 청년 토드(Todd)와 로맨스에 빠진다. 삼촌 샤를(Charles)은 골동품 상인으로, 핍핀에게 때때로 현실적인 조언을 건넨다. 이 가족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왕정이라는 새로운 현실에 적응하거나 이용하거나 저항한다. 스타인벡은 이 인물군을 통해 권력이 개인과 가족을 어떻게 변형시키는지를 날카롭게 포착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핍핀 자신도 자신에게 부여된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사회학적으로 “역할이 정체성을 만든다(Role creates identity)”는 명제를 문학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교수가 교수처럼 말하게 되고, 부모가 부모처럼 생각하게 되듯, 핍핀은 왕처럼 고민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소박한 개혁을 꿈꾸며 자전거를 타고 파리 시내를 돌아다니던 그가, 점점 왕으로서의 책임을 의식하게 된다. 스타인벡은 이를 통해 묻는다. 우리가 가진 정체성은 타고난 것인가, 아니면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이 만들어낸 것인가.
이 질문은 『에덴의 동쪽』의 핵심 주제인 timshel — “너는 할 수 있다”는 선택의 자유 — 과도 맞닿아 있다. 핍핀은 왕좌를 선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그 안에서 어떻게 살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 무거운 리얼리즘으로 인간의 자유 의지를 탐구했던 스타인벡이, 풍자라는 형식을 빌려 같은 질문을 다시 던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형식은 달라졌지만 질문은 하나다.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 안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이 질문은 문학을 넘어 우리 일상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권위란 무엇인가]에서 같은 주제를 인문학적 시선으로 풀어낸 글을 함께 읽어보길 권한다.
상징이 세상을 움직인다 — 권위는 어디에서 오는가
핍핀 4세가 2026년의 독자에게도 유효한 이유는 이 소설이 권위의 본질을 정면으로 다루기 때문이다. 핍핀이 왕이 된 것은 그가 특별해서가 아니다. 사람들이 왕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자들은 타도할 군주가 필요했고, 우파는 질서의 상징이 필요했으며, 대중은 혼란 속에서 매달릴 이야기가 필요했다.
막스 베버(Max Weber)가 말한 카리스마적 권위(Charismatic Authority)는 지도자의 내재적 능력이 아니라 추종자들의 믿음에서 온다. 스타인벡은 이것을 1957년에 이미 소설로 보여주었다. 왕관, 궁전, 의식, 국기 — 이 상징들은 실제 힘이 없다. 그러나 사람들을 움직인다. 핍핀이 왕좌에 앉은 순간부터 그는 권위를 가진 존재가 된다. 스타인벡이 미국이라는 나라 자체를 하나의 구성된 이야기로 바라본 시각이 궁금하다면 [미국은 발견이 아니라 ‘구성’이다]를 참고하길 바란다.
이것은 오늘날 인플루언서, 정치인, 유명인이 작동하는 방식과 다르지 않다. 수백만 팔로워를 가진 유튜버가 말하면 사람들이 믿는 것은, 핍핀에게 왕관을 씌우고 절하는 것과 구조적으로 같다. 플랫폼이 달라졌을 뿐, 인간이 상징에 반응하는 본능은 변하지 않았다.
또한 스타인벡은 이 소설에서 민주주의의 피로감을 정면으로 다룬다. 정치적 교착이 극에 달하면 사람들은 강한 지도자 한 명을 원하게 된다. 자유보다 질서를, 토론보다 결정을 원하게 된다. 소설 속 프랑스인들이 왕을 원한 것은 왕정이 좋아서가 아니라 민주주의가 너무 지쳤기 때문이다. 스타인벡은 1957년 냉전 시대의 프랑스를 배경으로 이 이야기를 썼지만, 정치 양극화와 포퓰리즘이 일상이 된 오늘날의 세계를 읽는 것처럼 소름 돋을 만큼 정확하다.
스타인벡은 이 소설에서 또 하나의 날카로운 관찰을 남겼다. 1957년 당시 미국인들이 왕족에 집착하고 어린 소녀들이 공주를 꿈꾼다는 것이다. 70년이 지난 지금, 영국 왕실 뉴스가 전 세계를 들썩이게 하고, 디즈니 공주가 여전히 어린이들의 꿈인 현실을 보면, 스타인벡의 관찰이 얼마나 정확했는지 새삼 놀라게 된다.
풍자는 스타인벡의 가장 진지한 언어였다
많은 독자와 비평가들이 『핍핀 4세』를 “분노의 포도를 쓴 작가가 말년에 쓴 가벼운 오락물”로 평가했다. 일부 비평가들은 “얇은 브로스(thin broth)”라 표현했고, 독자들은 “스타인벡답지 않다”고 실망을 표했다. 그러나 이 평가들은 풍자 문학의 본질을 오해한 데서 비롯된다.
풍자(Satire)는 직접 비판보다 훨씬 더 날카로운 무기다. 조나단 스위프트(Jonathan Swift)의 『걸리버 여행기』(Gulliver’s Travels)가 어린이 동화처럼 읽히지만 실제로는 영국 정치에 대한 신랄한 공격이었듯, 볼테르(Voltaire)의 『캉디드』(Candide)가 유쾌한 모험담처럼 읽히지만 계몽주의 낙관론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듯, 핍핀 4세의 황당한 왕정 복고 이야기는 민주주의, 권위, 국가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스타인벡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다. 그는 리얼리즘으로 분노를 표현했고, 풍자로 조소를 표현했다. 두 언어는 달랐지만, 그 뿌리에 있는 인간에 대한 시선은 같았다.
주목할 것은 스타인벡이 이 소설을 쓴 시점이다. 1957년은 그가 『에덴의 동쪽』을 발표한 지 5년이 지난 시점이었고, 노벨문학상을 받기 5년 전이었다. 그는 이미 세계적 명성을 얻었고, 더 이상 무언가를 증명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 시점에 가장 짧고 가장 가벼운 소설을 썼다는 것은, 오히려 이 작품이 스타인벡이 가장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담은 작품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2003년 산호세 주립대학교 마사 히즐리 콕스 스타인벡 연구센터(The Martha Heasley Cox Center for Steinbeck Studies)에서 방문학자로 머물던 시절[스타인벡 살리나스 — 23년 전, 작가의 땅을 처음 밟던 날], 이 작품에 대한 자료를 체계적으로 접할 기회가 있었다. 당시 센터의 아카이브에는 스타인벡이 유럽 체류 중 프랑스 정치에 깊이 관심을 가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었다. 핍핀 4세는 즉흥적 유머가 아니라 치밀하게 준비된 정치적 성찰이었다. 그리고 그 성찰은 지금도 유효하다.

결론 — 핍핀 4세는 스타인벡이 웃으며 던진 가장 무거운 돌이었다
『핍핀 4세』를 닫으며 독자는 이상한 감각을 경험한다. 분명히 웃으며 읽었는데, 어느새 무거운 질문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왜 사람들은 왕을 원하는가. 권위는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국가, 민주주의, 지도자라는 개념은 과연 “fabrication”이 아닌가.
수십 년 강단에서 스타인벡을 가르치면서, 학생들에게 이 작품을 소개할 때마다 처음에는 비슷한 반응이 돌아온다. “이게 정말 스타인벡이 맞나요?” 그런데 조금 더 들어가면 눈빛이 달라진다. 소설 속 프랑스의 혼란이 오늘날 우리가 매일 뉴스에서 보는 장면들과 너무 닮아 있기 때문이다. 정치 교착, 포퓰리즘, 강한 지도자에 대한 갈망 — 스타인벡은 1957년에 이미 우리의 2026년을 쓰고 있었다.
스타인벡은 이 소설에서 분노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웃으며 가장 불편한 질문을 던졌다. 그것이 풍자가 리얼리즘보다 더 오래 살아남는 이유다. 핍핀 4세는 스타인벡이 평생 탐구한 주제 — 인간의 자유 의지, 권위의 허구성, 사회 시스템과 개인의 충돌 — 를 가장 가볍고 가장 날카롭게 압축한 작품이다.
한국에서 이 작품에 대한 KCI 논문이 단 한 편도 없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이 소설이 얼마나 많은 가능성을 품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스타인벡을 읽는다는 것은 무거운 고전을 소화하는 것이 아니다. 핍핀 4세를 포함한 스타인벡 전작품이 궁금하다면 [존 스타인벡 대표작 가이드]에서 전체 작품 세계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웃음 뒤에 숨은 질문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질문 앞에서, 우리는 지금도 핍핀처럼 서 있다.
존 스타인벡 문학 전체를 한눈에 보려면 → 존 스타인벡 완전 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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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 추천:
① Wikipedia — The Short Reign of Pippin IV: https://en.wikipedia.org/wiki/The_Short_Reign_of_Pippin_IV
② Penguin Classics 공식 소개: https://www.penguin.co.uk/books/57340/the-short-reign-of-pippin-iv-by-john-steinbeck/978014118605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