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커스 분장실에서 거울 속 자신의 노쇠한 얼굴을 응시하는 중년 곡예사, 스타인벡 『불꽃처럼 타오르며』 조 솔의 정체성과 불안

존 스타인벡 『불꽃처럼 타오르며』: 4명의 인물, 3개의 무대, 하나의 질문

『불꽃처럼 타오르며』(Burning Bright, 1950)를 처음 펼쳤을 때, 필자는 솔직히 당황했다. 서커스에서 농장으로, 농장에서 선상으로 — 배경이 세 번씩 바뀌는데 인물들의 이름은 그대로다. 조 솔(Joe Saul)은 곡예사였다가 농부였다가 선원이 된다. 처음에는 스타인벡이 실험적 형식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독자를 혼란에 빠뜨린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계속 읽어나갈수록, 그 의도된 ‘낯섦’이 핵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스타인벡은 의도적으로 이 이야기가 어느 특정 직업, 어느 특정 시대의 것이 아니라고 선언하고 있었다. 『불꽃처럼 타오르며』는 불임과 부성이라는 가장 사적인 문제를 인류 보편의 언어로 번역하려 한 야심찬 시도다.

플레이노벨렛이라는 형식 실험, 왜 중요한가

스타인벡은 이 작품의 서문(Author’s Foreword)에서 직접 밝힌다. 자신은 『생쥐와 인간』(Of Mice and Men)과 『달은 지다』(The Moon Is Down)에 이어 세 번째로 ‘플레이노벨렛(play-novelette)’이라는 형식을 시도했다고. 희곡처럼 읽히지만 소설처럼 쓴 이 형식은, 대화만으로는 드러낼 수 없는 인물의 내면 심리까지 서술자의 눈으로 포착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갖는다.

그러나 『불꽃처럼 타오르며』에서 스타인벡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세 개의 막(幕)에서 배경은 서커스 → 농장 → 바다라는 전혀 다른 세계로 바뀌지만, 조 솔(Joe Saul)과 모딘(Mordeen), 프렌드 에드(Friend Ed), 빅터(Victor)라는 네 인물의 이름과 관계 구조는 그대로 유지된다. 이것은 단순한 구성상의 묘기가 아니다. 스타인벡은 이 기법을 통해 인류의 모든 직업, 모든 계층, 모든 시대에 반복되는 보편 서사가 있음을 형식 자체로 주장한다. 곡예사의 서커스에서 일어나는 일이 농부의 농장에서도, 선원의 배 위에서도 똑같이 일어난다. 혈통에 대한 집착, 불임의 공포, 배우자를 위한 희생, 그리고 결국 찾아오는 보편적 사랑 — 이것들은 직업이나 환경에 의존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불꽃처럼 타오르며』는 스타인벡의 문학 세계 안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한다. 그는 대개 특정한 지역(캘리포니아 살리나스 계곡, 몬트레이 어촌)과 특정한 계층(이주 노동자, 소작농)을 통해 보편성에 도달하는 작가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만큼은 배경의 특수성 자체를 의도적으로 해체하고 있다.

 『불꽃처럼 타오르며』 어두운 서커스 텐트 분장실, 거울 앞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는 조 솔의 모습 — 불꽃처럼 타오르며 속 실존적 고독

조 솔의 집착 — 혈통은 왜 집착이 되었나

조 솔의 문제는 표면적으로는 불임이지만, 본질적으로는 ‘혈통 이데올로기’다. 그는 서커스 곡예사 시절 친척 월(Cousin Will)을 잃은 직후 빅터를 파트너로 맞이하지만, 끊임없이 불만을 품는다.

“His blood is not my blood. He has no ancestry in it.”
(그의 피는 내 피가 아니다. 그에게는 혈통이 없다.)

이 한 문장이 조 솔의 세계관을 압축한다. 그에게 기술과 직업은 단순한 훈련의 결과가 아니라 수천 년을 거쳐 전수된 ‘피의 유산’이다. 그의 조부 올드 조 솔(Old Joe Saul)이 어릴 때 들려준 이야기 — 광대와 곡예사의 조상은 자연신이었고, 그리스의 신이었고, 로마의 검투사였고, 암흑 시대의 유일한 빛이었다는 — 는 조 솔에게 단순한 가족사가 아니라 신화이자 종교다. 이 혈통의 서사가 끊기는 것을 그는 문자 그대로 자신의 죽음과 동일시한다.

“A man can’t scrap his blood line, can’t snip the thread of his immortality.”
(인간은 자신의 혈통을 폐기할 수 없다. 자신의 불멸성이라는 실을 잘라버릴 수 없다.)

눈여겨볼 것은 스타인벡이 이 집착을 단순히 부정하거나 조롱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조 솔의 고통은 진짜다. 스타인벡은 그것의 진정성을 충분히 살리면서, 동시에 그 집착이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들을 파괴하는지를 보여준다. 조 솔은 불임의 가능성 앞에서 아내와의 관계 자체를 의심하기 시작하고, 술에 빠지고, 결국 거울 앞에서 자신을 부수는 행위로 귀결된다. 서커스 막에서 그가 트렁크 위의 거울을 쾅 닫아 깨뜨리는 장면 — 그것은 자기 정체성의 붕괴를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몸짓이다.

스타인벡은 『에덴의 동쪽』(East of Eden)에서도 아담 트래스크(Adam Trask)를 통해 비슷한 주제를 다루었지만, 조 솔은 더 극단적이다. 아담이 캘리포니아 대지 위에서 서서히 파괴되어 가는 데 반해, 조 솔은 자신의 불임이 확인되는 순간 거의 즉각적으로 아내를 향한 살인 충동을 느낀다.

모딘의 희생 — 이것은 배신인가 사랑인가

모딘은 스타인벡이 창조한 가장 복잡한 여성 인물 중 하나다. 그녀는 남편이 불임이라는 사실을 의학적으로 알고 있으면서도 이를 숨긴다. 그리고 조 솔이 간절히 원하는 아이를 얻기 위해 그가 혐오하는 빅터와의 관계를 감수한다.

이 행위를 어떻게 볼 것인가? 단순히 윤리적 기준으로 재단하면 이것은 배신이다. 그러나 스타인벡은 모딘의 내면을 이렇게 묘사한다.

“I will do anything — anything — anything to bring content to him.”
(나는 그에게 평안을 가져다주기 위해 무엇이든 — 무엇이든 — 무엇이든 하겠다.)

그녀가 빅터와의 만남 직전 자신에게 되뇌는 말은 조 솔의 이름이다. 그것이 비유가 아니라 실제 내면의 행위임을 스타인벡은 분명히 한다.

“The little seed may have been yours, I have forgotten. But no love was given or offered or taken.”
(씨앗은 당신의 것이었을 수도 있다, 나는 잊었다. 하지만 사랑은 주어지지도 받지도 취하지도 않았다.)

모딘이 빅터에게 쏘아붙이는 이 말은 스타인벡의 인식론적 주장이기도 하다. 사랑이 없는 성행위는 생물학적 사건일 뿐이다. 그녀에게 그 행위의 전체는 오직 조 솔을 위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모딘은 스스로를 배신자가 아니라 희생자로 — 아니, 희생을 선택한 사람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스타인벡은 이 논리를 미화하지 않는다. 모딘 자신도 그 행위를 “an alien thing, a dark self”라고 부른다. 그녀가 선상 장면에서 빅터를 죽이려 단도를 꺼내는 장면은, 그 ‘이질적인 것’이 그녀 안에서 이미 폭력으로 전환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불꽃처럼 타오르며』 눈 내리는 겨울 농가 주방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앉아 있는 임신한 모딘 — 불꽃처럼 타오르며 2막의 평온과 불안

프렌드 에드의 질책 — 스타인벡이 가장 힘든 말을 한 지점

이 작품에서 가장 강렬한 장면은 출산 직전 선상에서 조 솔과 프렌드 에드가 맞닥뜨리는 대화다. 조 솔은 의사에게 자신의 정자를 현미경으로 직접 확인했다고 고백한다.

“I saw them — shrunken and crooked and dead, corpses of sperm — dead.”
(나는 그것들을 봤다 — 쪼그라들고 굽고 죽어 있는, 정자의 시체들 — 죽어 있었다.)

이 순간 조 솔은 아내를 죽이겠다고 말한다. 프렌드 에드의 반응이 독자를 충격에 빠뜨린다. 그는 위로하지 않는다. 오히려 조 솔의 뺨을 손바닥으로 후려친다.

“Stand up, you cowardly, dirty thing! Stand up, or by Christ I’ll hit you sitting down!”
(일어나, 이 비겁하고 더러운 것아! 일어나라, 아니면 빌어먹을, 앉은 채로 쳐버리겠다!)

프렌드 에드는 이어 말한다. 모딘의 행위는 조 솔의 ‘작은 자아(ego)’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큰 사랑이었다고. 조 솔이 보지 못한 것은 ‘내 씨앗이 아니다’라는 생물학적 사실이 아니라, 그 사실을 넘어서는 사랑의 의지라는 것이다. 프렌드 에드의 질책은 스타인벡이 이 작품에서 실제로 하고 싶었던 말이다.

“It is the race, the species that must go staggering on.”
(가야 하는 것은 종족이다, 인류라는 종(種)이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불꽃처럼 타오르며』의 클라이맥스에서 조 솔은 자신이 걸어온 지적 여정을 이렇게 요약한다. “모든 아이의 아버지는 모든 남자이고, 모든 남자는 모든 아이의 아버지다(every man is father to all children and every child must have all men as father).” 이 보편 부성의 인식에 도달하기까지 그는 아내를 잃을 뻔했고, 친구를 잃을 뻔했고, 자신을 잃었다.

스타인벡이 이 작품을 아내 엘레인(Elaine)에게 헌정하면서 “To, for, and because of Elaine”이라고 쓴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작품의 모딘에게는, 사랑이 씨앗보다 먼저라는 신념이 있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호랑이와 스타인벡의 불꽃

제목 『불꽃처럼 타오르며』는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의 시 「타이거」(“The Tyger”)의 첫 행 “Tyger! Tyger! burning bright / In the forests of the night”에서 왔다. 블레이크가 묻는 것은 ‘두려운 대칭(fearful symmetry)’을 만든 존재가 누구인가 하는 신학적 질문이다. 그 질문은 아름다움과 공포, 창조와 파괴가 동일한 원천에서 나온다는 낭만주의적 통찰을 담고 있다.

스타인벡이 이 시를 제사(題詞)로 택한 것은, 조 솔의 집착이 곧 그의 힘이기도 하다는 역설을 미리 선언하는 행위다. 혈통에 대한 맹목적 집착이 조 솔을 파괴하지만, 바로 그 집착의 강도가 그를 마침내 더 깊은 사랑으로 이끈다. 블레이크의 불꽃이 두려움 속에서도 빛나듯, 조 솔의 불꽃은 파괴와 재생을 동시에 품는다.

스타인벡 연구자로서 30년 이상 이 작품을 읽어온 필자에게, 『불꽃처럼 타오르며』는 오래도록 과소평가된 작품이었다. 동시대 비평가들은 지나치게 추상적이라며 혹평했다. 그러나 지금 다시 읽으면, 스타인벡이 이 작품에서 시도한 것이 얼마나 어렵고 또 얼마나 절실한 것이었는지가 보인다. 그는 가장 사적인 고통 —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공포 — 을 인류 전체의 이야기로 확장하려 했다. 그리고 그 확장의 열쇠는 혈통이 아니라 사랑임을 마지막 장면에서, 병실의 새하얀 빛 속에서, 마스크를 벗은 조 솔의 빛나는 얼굴로 보여준다.

『불꽃처럼 타오르며』 병실에서 마스크를 벗고 신생아를 내려다보며 환하게 웃는 조 솔 — 불꽃처럼 타오르며 결말의 빛나는 순간

“There is a shining.”
(빛나는 것이 있다.)

스타인벡이 조 솔의 입을 통해 인류에 대해 내리는 최종 판결이 이 한 문장이다. 스스로를 파괴하는 본능을 지녔으면서도, 아름다움을 만드는 유일한 존재 — 그것이 인간이고, 그 빛남이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것이 곧 불꽃처럼 타오르는 행위다.

결론 — 스타인벡의 가장 불편한 질문

『불꽃처럼 타오르며』는 불편한 작품이다. 모딘의 선택에 대해 독자는 쉽게 판단을 내릴 수 없다. 빅터의 죽음을 두고도, 프렌드 에드의 질책을 두고도 마찬가지다. 스타인벡은 이 작품에서 윤리적 판단을 유예시키고, 대신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다음 세대에 전달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유전자인가, 사랑인가? 혈통인가, 기억인가?

조 솔이 병실에서 마스크를 벗는 순간, 그 질문에 대한 스타인벡의 답이 비로소 완성된다. 얼굴은 중요하지 않다. 피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빛남(a shining)’을 전달하는 행위 자체다. 그것이 불꽃처럼 타오르는 것이다.


시리즈 내비게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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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 링크 추천:

  1. 스타인벡 『생쥐와 인간』 분석 포스트 → 꿈의 좌절이라는 주제 연결
  2. 스타인벡 『에덴의 동쪽』 분석 포스트 → 가문과 혈통 집착 주제 연결
  3. 스타인벡 『진주』 분석 포스트 → 욕망과 강박의 서사 연결
  4. 스타인벡 『분노의 포도』 분석 포스트 → 공동체와 생존 본능 주제 연결

외부 링크 추천:

  1. National Steinbeck Center 공식 사이트 (steinbeck.org) — 작품 소개 및 전시 자료
  2. The Martha Heasley Cox Center for Steinbeck Studies, SJSU (sjsu.edu/steinbeck) — 학술 아카이브
  3. 윌리엄 블레이크 「타이거」(“The Tyger”) 원문 — 작품 제목 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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