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인벡 의심스런 싸움 속 버튼 의사를 상징하는 장면, 석양 속 군중을 등지고 홀로 선 인물

존 스타인벡의 『의심스런 싸움』이 친공산주의도 반공산주의도 아닌 3가지 이유

스타인벡 의심스런 싸움, 이 작품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스타인벡의 『의심스런 싸움』은 단순한 파업 소설이 아닙니다. 하지만 스타인벡 문학에서는 대공황이라는 역사적 격변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집단의 본질을 탐구하는 작품으로 더 깊이 있게 다루어집니다. 이 글에서 스타인벡 『의심스런 싸움』이 왜 좌파와 우파 어느 편도 아닌 인본주의적 선언으로 읽혀야 하는지, 그 문학적 역설의 의미를 정리했습니다.

필자가 존 스타인벡(John Steinbeck)의 『의심스런 싸움』(In Dubious Battle)을 처음 진지하게 읽은 것은 박사과정 시절이었다. 노동 파업 소설로 분류된다는 선입견을 안고 펼쳤다가, 도저히 한 줄로 요약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혔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 작품은 분명 노동소설의 외형을 하고 있었지만, 스타인벡이 진짜 응시하고 있는 것은 이념이 아니라 인간이었다. 그 감각이 필자를 수십 년간 이 소설로 되돌아오게 만들었다.

스타인벡이 1936년에 발표한 『의심스런 싸움』은 캘리포니아 사과 과수원 지대를 배경으로 공산당 조직원 맥(Mac)과 그의 제자 짐(Jim)이 농업 노동자들의 파업을 이끄는 과정을 그린다. 소설의 제목 자체가 존 밀턴(John Milton)의 『실낙원』(Paradise Lost) 1권 104행의 “하늘의 벌판에서 승부나지 않는 싸움으로”(In dubious Battle on the Plains of Heaven)에서 직접 따온 것이다.

이 인용은 단순한 문학적 치장이 아니다. 스타인벡은 이 소설의 싸움이 노동자 대 자본가의 단순한 계급 투쟁이 아니라, 선과 악, 개인과 집단,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결코 쉽게 승패를 가를 수 없는 근원적인 인간의 싸움임을 처음부터 선언하고 있다.

이 글의 논지는 분명하다. 스타인벡 의심스런 싸움은 정치 소설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그 본질은 어떤 이념보다 인간을 믿는다는 작가의 인본주의적 선언이다.

스타인벡 의심스런 싸움 - 1930년대 미국 캘리포니아 농업 파업 현장을 연상시키는 흑백 분위기의 과수원 풍경]

스타인벡의 『의심스런 싸움』과 집단이론: 인간은 무리 속에서 무엇이 되는가

스타인벡이 이 소설을 구상하던 1930년대 초반, 세계는 집산주의와 파시즘이 동시에 팽창하던 격변의 시기였다. 대공황으로 캘리포니아 농업 지대의 노동자 임금은 사상 최저로 떨어졌고, 공산당은 효과적으로 농업 노동자 조합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스타인벡은 1933년과 1934년 겨울 샌 조아퀸 밸리(San Joaquin Valley) 파업의 주동자들을 직접 만나 노동자들의 실상을 취재했다. 그러나 그가 이 경험에서 끌어낸 것은 정치적 결론이 아니었다.

스타인벡이 품은 질문은 이것이었다. 인간이 집단 속에 들어갈 때 어떤 변화를 겪는가. 이 사유의 결과물이 바로 스타인벡의 『의심스런 싸움』에서 구체화된 그의 독창적인 집단이론(phalanx theory)이다. 집단이론은 개별 인간을 독립된 주체로 보지 않고, 물고기 떼나 세포들의 군집처럼 거대한 생명의 무리 속에 편입된 하나의 단일한 구성단위로 파악하는 이론이다. 이 집단인(group-men)은 개인의 집합체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속성을 가진 새로운 유기체다.

소설 속에서 이 집단이론의 본질은 버튼 의사(Doc Burton)의 입을 통해 가장 명확하게 표현된다.

“Yes. Group-men are always getting some kind of infection. This seems to be a bad one. I want to see, Mac. I want to watch these group-men, for they seem to me to be a new individual, not at all like single men. A man in a group isn’t himself at all, he’s a cell in organism that isn’t him any more than cells in your body are like you.”


“그렇습니다. 집단인은 항상 전염병 같은 것에 걸려 있습니다. 이번은 아주 지독한 전염병인 것 같아요. 맥, 저는 관찰하고 싶을 뿐입니다. 이 집단인을 관찰하고 싶어요. 왜냐하면 이 집단인이 나에겐 하나하나의 개인들로 보이는 게 아니라 새로운 하나의 개인으로 보이기 때문이죠. 집단 속의 사람은 전혀 자기 자신이 아닙니다. 조직 속의 세포 같은 거죠. 몸속의 세포가 자기 자신이 아니듯이 사람도 자기 자신이 아닌 겁니다.”

스타인벡 의심스런 싸움에서 파업에 동참한 노동자들은 점점 개별적인 이성과 판단력을 상실한 채, 승리 혹은 파괴라는 단 하나의 목적을 향해 질주하는 거대한 생명체로 돌변한다.

스타인벡은 이 현상을 도덕적으로 재단하지 않는다. 그는 냉정한 과학자처럼 관찰한다. 그러나 이 관찰의 이면에는 집단이론이 지닌 어두운 진실, 즉 집단의 목적을 위해 개인의 실존과 권리가 얼마나 쉽게 무시될 수 있는가에 대한 깊은 불안이 흐른다.

짐은 소설 초반 이렇게 말한다.

“I want to work toward something.”
“나는 무엇인가를 위해 일하고 싶습니다.”

이 짧은 문장은 스타인벡 의심스런 싸움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이다. 짐은 개인적 삶의 공허함을 집단 속에서 극복하려 한다. 그러나 스타인벡은 집단 속으로 들어가는 인간이 점점 자신의 개별적 윤리를 잃어가는 과정을 냉정하게 추적한다. 그래서 이 작품은 단순한 프롤레타리아 소설을 넘어 거의 철학소설에 가까운 위치를 점한다. 스타인벡 의심스런 싸움이 오늘날까지 깊이 읽히는 이유다.

스타인벡 의심스런 싸움 - 책상 위에 낡은 소설책과 타자기가 놓인 1930년대 작가의 서재 분위기

스타인벡 의심스런 싸움 속 이념의 냉혹함: 맥과 짐이 보여주는 것

스타인벡 의심스런 싸움 속 이념의 실체는 맥(Mac)이라는 인물을 통해 가장 냉혹하게 드러난다. 공산당 조직원 맥은 결코 영웅이 아니다. 그는 처음부터 이 파업이 실패할 것임을 직감하면서도 당(Party)의 상위 목적을 위해 파업을 이용하는 노련한 기회주의자다. 그의 최우선 목표는 파업의 승리가 아니라, 노동자들의 분노를 극대화하여 이념적 대의를 확산시키는 데 있다.

이념 과잉의 냉혹함은 동료의 죽음을 다루는 맥의 태도에서 극에 달한다. 파업 도중 동료 노동자 조이(Joy)가 총에 맞아 사망하자, 맥은 슬퍼하기는커녕 그의 시체와 관을 시위 대열의 맨 앞에 세워 군중을 선동할 희생 제물로 활용하려 한다. 인간의 죽음마저 집단의 동력원으로 전락시키는 이 비정한 기회주의에 버튼 의사는 강한 혐오감을 드러내며 단호히 반대한다.

그러나 스타인벡 의심스런 싸움은 반공산주의 소설도 아니다. 스타인벡이 스스로 밝혔듯, 그는 공산주의자들 중 일부가 비인간적으로 독선적이라는 점을 불쾌하게 여겼지만, 동시에 파업 현장에서 굶주리는 노동자들의 현실 앞에 아무런 도덕적 판단도 내리지 않는다. 좌파 잡지 『뉴 메시즈』(New Masses)와 보수적인 출판물 양측이 동시에 이 작품을 호평할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스타인벡은 편지에서 “양측으로부터 논쟁의 대상이 되는 대신에 오히려 양측은 이 작품을 보호하는 것 같다”고 직접 언급했다.

맥과 대립하는 짐의 변화 과정은 더욱 비극적이다. 순수하고 정의감 넘치는 청년이었던 짐은 점점 집단의 논리에 흡수되어 자신이 이념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죽어간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짐의 얼굴 없는 시체는 다시 맥의 선동 연설의 재료가 된다. 비평가들이 “He becomes every man”이라고 표현하듯, 짐은 이제 특정한 개인이 아니라 이념의 이름으로 소모되어온 모든 인간의 표상이 된다. 스타인벡이 집단이론의 역학 속에서 개별 주체들이 이념의 소모품으로 사라져 가는 참상을 집약한 가장 강렬한 순간이다.

버튼 의사의 자리: 스타인벡 의심스런 싸움이 선택한 인본주의

스타인벡 의심스런 싸움에서 가장 많은 해석 논쟁을 불러일으킨 인물은 버튼 의사다. 그는 농업 노동자들의 건강을 돌보기 위해 파업 현장에 머물지만, 공산주의 이념에도 자본주의에도 동조하지 않는 방관자적 존재다. 비목적론적 사고(Non-teleological thinking)의 실천자인 그는 사태를 어떤 인위적인 도덕적 잣대나 정치적 목적으로 재단하지 않고 현상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관찰한다.

많은 비평가들은 버튼 의사를 스타인벡 자신의 입장을 대변하는 인물로 본다. 루이스 오웬스(Louis Owens)는 “버튼 의사는 스타인벡 관점의 대변인이다.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지 않은 것에 대한 그의 초연하고 지적인 입장은 소설가와 그 인물과의 관계를 반영한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버튼 의사가 소설의 중반에 조용히 사라진다는 사실은 그를 단순한 작가의 대변자로 보는 것이 충분하지 않음을 암시한다.

버튼 의사의 핵심 발언은 스타인벡 의심스런 싸움 전체를 관통하는 윤리적 명제를 담고 있다.

“주의를 믿는 게 아니라 사람을 믿는 거죠.” “I believe in men, not in causes.”

그는 폭력으로는 폭력적인 것만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역시 굶주리는 수백만의 현실 앞에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 스타인벡은 독자에게 쉬운 해답을 주지 않는다. 버튼 의사의 인도주의적 시선이 옳다 하더라도, 그 시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긴장감이 소설 전체에 팽팽하게 흐른다. 이 불편한 긴장이야말로 스타인벡 의심스런 싸움이 단순한 사회소설을 넘어서는 지점이다.

스타인벡 의심스런 싸움 -  군중이 모여 있는 황량한 들판, 개인과 집단의 긴장감을 상징하는 구도

승부나지 않는 싸움이 남긴 것: 밀턴과 스타인벡의 대화

스타인벡 의심스런 싸움의 제목이 밀턴의 실낙원에서 왔다는 사실은 이 소설의 해석 지평을 근본적으로 확장한다. 실낙원에서 사탄은 패배를 알면서도 하느님에게 맞서 싸운다. 그 싸움은 승부가 나지 않는 싸움(dubious battle)이다. 그러나 사탄은 패배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는 용기와 불굴의 의지를 얻는다.

스타인벡은 이 신화를 노동 파업이라는 현대적 맥락에 대입한다. 맥과 짐이 이끄는 파업도 처음부터 패배가 예견된 싸움이다. 그러나 그 싸움이 완전히 무의미하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려는 본능적인 저항이기 때문이다.

비평가 조세프 폰텐로즈(Joseph Fontenrose)가 지적했듯, 소설 속 캘리포니아 사과 과수원은 에덴동산의 금단의 과실을 따는 장소와 겹친다. 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키는 그 장소가 사과 과수원이라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스타인벡은 밀턴의 신화적 프레임을 원용함으로써 이 투쟁이 지닌 근원적인 모호성과 비극성을 심화하고, 당대 낭만적 집산주의의 환상을 냉정하게 깨부순다.

스타인벡 의심스런 싸움은 파업의 성패를 결론짓지 않은 채 끝난다. 작가는 출판사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밝혔다.

“And so I have used a jerky method. I ended the book in the middle of a sentence. There is a cycle in the life of a man but there is no ending in the life of Man. I tried to indicate this by stopping on a high point, leaving out any conclusion.”
나는 비정상적인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책을 문장 한가운데서 끝냈습니다. 인간 개인의 삶에는 사이클이 있지만 인류의 삶에는 끝이 없습니다. 나는 결론을 내지 않고 절정에서 멈춤으로써 이를 나타내려 했습니다.

바로 이 미완의 구조가 스타인벡 의심스런 싸움이 90년이 가까운 세월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 되는 이유다. 집단은 인간을 구원하는가, 아니면 인간을 소모하는가. 작가는 끝내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다.

결론

스타인벡 의심스런 싸움은 친공산주의 소설도, 반공산주의 소설도 아니다. 그것은 어떤 이념이든 인간을 수단으로 삼는 순간 폭력으로 귀결된다는 것을 냉혹하게 증언하는 인본주의 문학이다. 스타인벡이 구현한 집단이론은 대공황이라는 미증유의 위기 속에서 인간 행동의 거시적 법칙을 탐색하려는 치열한 시도였다. 그러나 소설의 비극적 종말이 증명하듯, 그는 인간이 거대한 유기체의 세포로 기능할 때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이성의 마비와 인간성의 말살을 가장 깊이 우려한 인도주의자였다.

버튼 의사의 “주의보다 인간을 믿는다”는 선언은 1930년대 대공황의 맥락을 넘어 오늘의 독자에게도 유효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도 다양한 이름의 이념들이 더 나은 세상을 약속하며 개인을 집단의 도구로 만드는 일은 끊이지 않는다. 스타인벡의 『의심스런 싸움』은 그렇게, 승부나지 않는 싸움을 독자의 내면으로 옮겨 놓는다. 그리고 바로 그 불편한 질문 자체가 이 소설을 위대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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