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스타인벡은 왜 “나는 미국을 보지 못했다”고 했을까 — 찰리와 함께한 여행 3편
찰리와 함께한 여행은 흔히 미국 횡단 여행기로 소개된다. 하지만 스타인벡 연구를 30년 가까이 해온 내게 이 작품은 처음부터 여행기가 아니었다. 이 글에서 마지막 장이 던지는 인식론적 질문 3가지를 깊이 읽는다.
찰리와 함께한 여행은 단순한 미국 횡단기가 아니다. 이 작품이 60년이 지난 지금도 읽히는 이유는 바로 그 안에 담긴 인식론적 질문 때문이다.
30년 넘게 스타인벡을 읽어왔지만, 『찰리와 함께한 여행』(Travels with Charley in Search of America)의 마지막 장을 처음 덮던 순간은 아직도 생생하다. 기대했던 감동이나 따뜻한 마무리 대신 텍스트 위로 묘한 서늘함이 내려앉았다. “4개월을 달렸는데, 결국 이 사람이 한 말이 ‘나는 미국을 보지 못했다’는 건가?”
그것이 바로 존 스타인벡이 찰리와 함께한 여행의 끝에서 독자에게 던지는 가장 불편하고 가장 정직한 고백이다. 많은 독자는 이 작품을 미국의 풍경과 사람들을 담은 기행문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같은 문장을 읽었는데도 연구를 계속할수록 작품이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경험은 흔하지 않다. 젊은 시절에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보였고, 지금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먼저 보인다.
2003년 연구년 기간, 나는 캘리포니아 살리나스를 직접 찾았다. 스타인벡 생가를 둘러보고, National Steinbeck Center에서 공개 자료들을 읽었으며, 산호세 주립대학교 마사 히즐리 콕스 스타인벡 연구센터(The Martha Heasley Cox Center for Steinbeck Studies)에서도 관련 자료를 검토하는 기회를 가졌다. 빛바랜 자료들 사이에서 내가 발견한 것은 대륙을 완벽하게 기록했다는 거장의 승전보가 아니었다. 수천 킬로미터를 달린 끝에 마주한 자기 의심, 즉 내가 본 것이 전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한 지식인의 지독한 고뇌와 쓸쓸한 흔적이 가득했다.
찰리와 함께한 여행은 미국에 관한 책이 아니다. ‘인간은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는가’를 묻는 책이다.

여행이 깊어질수록 흔들리는 관찰자 — 선택적 관찰의 함정
찰리와 함께한 여행 속 존 스타인벡이 1960년 가을 낡은 GMC 트럭 ‘로시난테’에 올라탈 때 그의 목표는 분명했다. 책상 위의 미국이 아니라 살아있는 미국을 직접 보겠다는 것. 1편에서 살펴보았듯 이것은 그의 지식애(Epistemophilia), 즉 앎에 대한 충동이 만들어낸 결단이었다.
찰리와 함께한 여행 초반의 스타인벡은 훌륭한 경청자였다. 트럭 운전사, 이동주택(Mobile Home) 거주자들과 벽 없이 대화하며 미국 서민의 목소리를 날것 그대로 흡수했다. 그러나 여행이 중반을 넘어서면서 묘한 균열이 감지되기 시작한다.
질문은 여전히 이어지지만, 답은 점점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는 과정이 아니라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던 생각을 확인하는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한다.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기보다 자신이 미리 규정해 둔 미국이라는 거대한 틀 안에 타인의 진술을 끼워 맞추려는 선택적 관찰(Selective Observation)의 함정이 나타나는 것이다.
한 대화 상대는 스타인벡의 질문에 이렇게 정곡을 찌르는 반문을 던진다.
“말씀하시는 그런 소속감을 가진 사람이 요새 세상에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이 한 마디는 찰리와 함께한 여행 전체에서 가장 날카로운 외부의 목소리다. 스타인벡은 “진짜 미국인의 소속감”을 찾으러 떠났지만, 정작 그 소속감이 이미 사라진 세계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질문이 틀렸거나, 아니면 그가 기대했던 답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거나.
여기에는 또 하나의 가능성이 있다. 관찰자 효과(Observer Effect)의 문제다. 존 스타인벡이라는 거대한 명성과 시선이 대화 상대의 입에서 나오는 말 자체를 변질시켰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는 진짜 미국을 보러 떠났지만, 어쩌면 자신이 이미 알고 있던 미국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여행의 대상이 어느 순간 미국에서 ‘인간의 인식’ 그 자체로 이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은 발견이 아니라 구성이었다 — “소우주 속의 대우주”가 말하는 것
여행의 끝자락에서 스타인벡이 남긴 문장은 표면적으로는 미국 예찬처럼 읽힌다.
“This huge country, this world’s superpower, with an infinite future, in the end turns out to be nothing more than a macrocosm of microcosm me.”
(이 거대한 나라, 이 세계 최강의 나라, 앞으로 무한한 장래를 가진 이 나라도 결국 알고 보면 나라는 소우주 속의 대우주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 고백의 진짜 무게는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관찰자의 외부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찰자인 ‘나’의 시선과 기억과 편견으로 직조된 결과물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텍스트의 한 지점을 오래 들여다본 적이 있다. 스타인벡은 “macrocosm of microcosm I”가 아니라 “macrocosm of microcosm me”라고 썼다. “I”는 세상을 바라보는 주체다. 반면 “me”는 이미 세상 안에 놓인 존재다. 이 작은 대명사 하나가 작품 전체의 방향을 바꾸어 놓는다. 스타인벡은 자신을 미국을 분석하는 외부 관찰자가 아니라, 미국이라는 거대한 이야기 속에서 끊임없이 영향을 받고 해석하는 한 인간으로 내려놓는 것이다.
결국 찰리와 함께한 여행에서 스타인벡은 미국을 발견(Discovery)하러 떠났지만, 실제로 한 일은 자신이 이미 알고 있던 미국을 구성(Construction)하는 것이었다. 스타인벡은 대륙을 횡단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자신의 내면세계를 한 바퀴 돌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대학 강의에서도 이 작품을 단순한 미국 횡단기로 소개하지 않는다. 학생들에게 “스타인벡은 미국을 여행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식을 여행했다”고 설명할 때 비로소 마지막 장의 의미가 열리기 시작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찰리와 함께한 여행은 여행문학을 넘어 인식론(Epistemology)에 관한 문학으로 확장된다.
우리는 모두 ‘해리’를 만들고 있다 — 상상의 공동체와 단편적 세계 구성
2편에서 살펴본 “쓸쓸한 해리”(Harry)를 기억하는가. 스타인벡은 한 모텔 방에 남겨진 몇 가지 흔적만으로 해리라는 인물의 전체 생애를 상상해냈다. 이 장면이 찰리와 함께한 여행에서 가장 인상적인 이유는 그것이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는 보편적 방식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매일 같은 일을 한다. 뉴스 한 줄, 영상 하나, 누군가의 짧은 말 한마디. 그 단편적인 조각들을 모아 하나의 완결된 세계상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는다.
스타인벡의 이러한 시선은 훗날 정치학자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이 정립한 상상의 공동체(Imagined Communities) 개념과 정확하게 맞닿아 있다. 우리는 한 나라의 구성원 대부분을 실제로 만나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한국인’ 혹은 ‘미국인’이라는 동질감을 느낀다. 그것은 우리가 같은 역사, 같은 언어, 같은 이야기를 공유하고 있다고 상상하기 때문이다.
4개월간의 고독한 여정 끝에 찰리와 함께한 여행이 도달한 진실도 이와 같다. 본래부터 존재하는 진짜 미국이란 그 어디에도 없으며, 동시에 관찰자가 시선을 던지는 모든 곳에 존재한다. 실체는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이 어떤 이름을 붙이고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매번 다르게 재구성된다.
2003년 살리나스를 직접 걸으면서 나를 사로잡았던 질문도 바로 이것이었다. “나는 지금 스타인벡의 살리나스를 보고 있는가, 아니면 내가 수십 년간 읽어온 텍스트가 만들어낸 살리나스를 보고 있는가?” 그 질문에 솔직하게 답하기가 어려웠다.
알고리즘 시대, 더 예리해진 질문 — 찰리와 함께한 여행이 지금 필요한 이유
존 스타인벡이 찰리와 함께한 여행을 통해 경고했던 것 — 관찰자는 자신도 모르게 보고 싶은 것만 선택한다 — 은 1962년 출판 당시보다 오늘 훨씬 더 날카로운 진단이 된다.
스타인벡 시대에는 그래도 낯선 사람과의 우연한 대화가 관찰자의 편견을 흔들어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알고리즘이 선택해준 세계다. 내가 이미 동의하는 것, 내가 이미 좋아하는 것, 내가 이미 믿는 것 — 그것만 계속해서 보여주는 구조, 이른바 필터 버블(Filter Bubble)이 일상화되어 있다.

트럭 로시난테 안에서 창밖을 보며 스타인벡이 행했던 선택적 관찰이 이제는 알고리즘이라는 이름으로 시스템화된 것이다. 찰리와 함께한 여행의 질문 — “당신이 보는 세계는 진짜인가, 아니면 당신이 만들어낸 이야기인가?” — 은 오늘 우리에게 그 어느 때보다 정직한 대답을 요구한다.
찰리와 함께한 여행을 다시 펼칠 때마다 스타인벡의 경고가 더 선명하게 들리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짜 미국을 온전히 붙잡지 못하고 돌아온 이 여정은 실패한 프로젝트인가. 문학 비평적 관점에서 대답은 단호하게 부정된다. 스타인벡은 미국을 이해하는 데 실패한 것이 아니다. ‘미국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 생각’ 자체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완전한 객관적 이해란 불가능하다는 인식론적 겸손함을 획득한 것, 그리고 그 발견 앞에서 끝까지 관찰의 끈을 놓지 않은 것 — 이것이 찰리와 함께한 여행을 단순한 여행기를 넘어서는 텍스트로 만드는 지점이다. 그것이 바로 1편에서 강조했던 지식애의 본질이다. 진리는 손에 잡히는 종착지가 아니라 끊임없이 의심하고 교정하며 길을 가는 고독한 과정 그 자체에 있다.
찰리와 함께한 여행을 덮는 순간, 우리에게 남는 질문은 하나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세계는 진짜인가, 아니면 내가 오랫동안 만들어온 하나의 이야기인가.”
이 질문 앞에서 솔직해지는 것이 인문학 독서의 출발점이다. 나는 오늘도 그 질문을 안고 다시 텍스트 앞에 앉는다.
시리즈 내비게이션
이 글은 찰리와 함께한 여행 시리즈 3편입니다.
1편 — 찰리와 함께한 여행 – 존 스타인벡이 58세에 트럭을 몬 이유
2편 — 스타인벡 시카고 호텔방에서 발견한 것 — 쓸쓸한 해리와 인간 인식의 3가지 비밀
3편 — 미국은 발견이 아니라 ‘구성’이다 — 존 스타인벡의 3가지 최종 깨달음(현재 글)
내부 링크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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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 추천:
- National Steinbeck Center 공식 사이트 (steinbeck.org)
- The Martha Heasley Cox Center for Steinbeck Studies (sjsu.edu)
- John Steinbeck — The Nobel Prize 공식 아카이브 (nobelprize.org)
📌 존 스타인벡 문학 전체를 한눈에 보려면 → 존 스타인벡 완전 가이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