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스타인벡의 『진주』2편 — 탐욕은 어떻게 인간을 무너뜨리는가?
카누 바닥이 부서진 것을 발견한 순간, 키노는 생각했습니다.
“살인보다 더 나쁜 죄가 있다.”
처음엔 이상하게 들립니다. 사람 목숨보다 배가 더 중요하다고? 그런데 읽다 보면 알게 됩니다. 그 배는 키노의 아버지가, 또 그 아버지의 아버지가 목숨처럼 지켜온 것이었습니다. 생계이자, 가문이자, 존엄 그 자체였습니다. 수선할 수도, 되살릴 수도 없는 것을 망가뜨리는 일 — 스타인벡은 그걸 살인보다 더 나쁜 죄라고 썼습니다.
저는 그 장면에서 책을 덮고 한참을 생각했습니다.
스타인벡 진주 탐욕이 만들어내는 악(惡)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오늘은 『진주』(The Pearl) 2편입니다. 진주 하나가 어떻게 인간의 본성 깊은 곳에 숨어 있던 탐욕을 건드리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다섯 가지 악의 얼굴로 드러나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 아직 1편을 못 읽으셨다면, 먼저 읽고 오시는 걸 권합니다. ← [1편: 존 스타인벡의 『진주』— 진주 하나가 인간에게 던진 질문]

스타인벡 진주 탐욕 — 진주는 인간을 타락시킨 것인가
스타인벡은 『진주』 서두에서 이렇게 씁니다.
“…there are only good and bad things and black and white things and good and evil things and no in-between anywhere.”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선과 악, 흑과 백, 선한 것과 악한 것만 있다. 그리고 중간은 없다.”
단호한 선언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소설을 읽다 보면, 사실 그 반대라는 걸 알게 됩니다.
『진주』 속 악인들은 뚜렷한 악당이 아닙니다. 의사는 환자를 치료하는 사람이고, 신부는 영혼을 인도하는 분이며, 진주 상인은 거래를 하는 상인입니다. 그런데 진주 하나가 등장하는 순간, 그들의 겉모습 아래 숨어 있던 욕망이 고개를 듭니다.
이 점이 핵심입니다.
스타인벡 진주 탐욕의 문제는 진주가 키노를 타락시킨 것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진주는 이미 존재하던 욕망을 드러냈을 뿐입니다.
불을 만든 것이 성냥이 아니라, 원래 그곳에 있던 가연물인 것처럼 말이죠.
그렇다면 이 탐욕은 어떤 경로로 악을 만들어낼까요? 스타인벡은 아주 치밀하게, 다섯 단계의 경로를 보여줍니다.
악의 다섯 얼굴 — 스타인벡 진주 탐욕이 걸어가는 경로
첫 번째: 속임수(Cheating) — 의사의 이중성
키노와 후아나가 전갈에 물린 아기 코요티토를 안고 의사를 찾아갔을 때, 의사는 방 안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인은 말했죠.
“The doctor has gone out. He was called to a serious case.”
“의사 선생님은 외출하셨습니다. 급한 왕진 요청을 받으셨거든요.”
그리고 하인은 재빨리 문을 닫아버렸습니다.
“And he shut the gate quickly out of shame.”
“수치심에 재빨리 문을 닫아버렸다.”
돈이 없다는 걸 알아챈 순간, 의사는 사라진 겁니다. 그는 파리의 레스토랑을 꿈꾸며 화려했던 지난날을 그리워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꿈을 되찾으려면 돈이 필요했고, 돈 없는 인디언 아이는 그의 관심 밖이었습니다.
그런데 키노가 “세상의 진주(Pearl of the World)”를 발견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의사는 갑자기 키노의 집을 직접 찾아옵니다. 아이를 “치료”하겠다고. 다 나아가던 아이에게 정체불명의 것을 먹여 증세를 일부러 악화시킨 뒤, 나중에 나타나 치료해주는 척합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When do you think you can pay this bill?” “He said it even kindly.”
“언제쯤 치료비를 낼 수 있을 것 같소?” “그는 심지어 친절하게 말했다.”
이게 스타인벡 진주 탐욕의 첫 번째 얼굴입니다. 문명의 가면을 쓴 속임수.
마을 거지들조차 의사의 “무지함, 잔인함, 탐욕, 식욕, 그리고 그의 죄악(his ignorance, his cruelty, his avarice, his appetites, his sins)”을 알고 있었다고 소설은 말합니다. 스타인벡은 가장 교육받은 인물을 통해 가장 먼저 탐욕을 드러냅니다.
문명은 인간을 선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탐욕을 더 세련되게 포장할 뿐입니다.
여러분이라면, 이 의사를 완전한 악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두 번째: 절도(Theft) — 야밤의 침입자들
진주 소문이 마을 전체로 퍼지자, 스타인벡은 마을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The black distillate was like the scorpion, or like hunger in the smell of food, or like loneliness when love is withheld.”
“그 검은 증류액은 전갈 같기도 하고, 음식 냄새를 맡았을 때의 허기 같기도 하고, 사랑이 억제당했을 때의 고독 같기도 했다.”
“The news stirred up something infinitely black and evil in the town.”
“그 소식은 마을 속에 무한히 검고 사악한 무언가를 뒤흔들어 놓았다.”
“The poison sacs of the town began to manufacture venom, and the town swelled and puffed with the pressure of it.”
“마을의 독주머니는 독액을 만들기 시작했고, 온 마을은 그 독의 압력으로 부어오르고 부풀어 올랐다.”
마을 전체가 독액을 만들기 시작했다는 표현 — 이게 스타인벡 특유의 비목적론적(non-teleological) 시선입니다. 악한 개인이 문제가 아니라, 마을이라는 유기체 전체가 반응하는 겁니다.
그날 밤 키노의 집에 누군가 침입합니다. 어둠 속의 “검은 물체(the dark thing)”였습니다. 스타인벡은 그들을 끝내 구체적으로 보여주지 않습니다. 얼굴도, 이름도 없는 존재. 그건 탐욕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후아나가 속삭입니다.
“This thing is evil. This pearl is like a sin! It will destroy us. Throw it away, Kino. Let us break it between stones. Let us bury it and forget the place. Let us throw it back into the sea. It has brought evil. Kino, my husband, it will destroy us.”
“이것은 악이에요. 이 진주는 죄악과 같아요! 우리를 파멸시킬 거예요. 던져버려요, 키노. 돌로 쳐서 부숴버려요. 땅에 묻고 그 장소를 잊어버려요. 바다에 다시 던져버려요. 이것은 악을 불러왔어요. 키노, 내 남편, 이것은 우리를 파멸시킬 거예요.”
그리고 키노의 대답도 인상적입니다:
“This is our one chance. Our son must go to school. He must break out of the pot that holds us in.”
“이것은 우리의 유일한 기회야. 우리 아들은 학교에 가야 해. 우리를 가두고 있는 그 틀을 깨고 나와야 해.”
키노는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그의 고집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부터 스타인벡 진주 탐욕의 비극은 점점 더 깊어지기 시작합니다.
당신은 타인의 행운을 진심으로 축하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속으로 질투하고 있습니까?
불편하지만, 정확한 질문입니다.
세 번째: 파괴(Destruction) — 살인보다 더 나쁜 죄
이 대목이 제가 이 소설에서 가장 충격적으로 읽은 부분입니다.
키노는 새벽에 카누를 발견합니다. 바닥이 누군가에게 박살 나 있었습니다. 그 순간 그는 생각합니다.
“The killing of a man was not so evil as the killing of a boat. For a boat does not have sons, and a boat cannot protect itself, and a wounded boat does not heal.”
“살인도 배를 파괴하는 것만큼 악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배는 자손도 없으며 자신을 방어할 수도 없고, 상처 난 배는 고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키노의 문화에서 카누는 단순한 도구가 아닙니다. 세대를 이어온 생존 수단이자 정체성 그 자체였습니다. 파괴된 카누는 다시 살릴 수 없습니다. 그건 한 가족의 미래를 통째로 지운 것입니다.
스타인벡 진주 탐욕의 세 번째 얼굴은 이렇게 말합니다. 탐욕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상대가 가진 것까지 부숴버리려 한다고.
직장에서, 인간관계에서, 사회에서 — 오늘날에도 그렇지 않습니까? 많은 갈등의 밑바닥에는 결국 이 심리가 숨어 있습니다.

네 번째: 방화(Arson) — 초가집을 불태우다
카누가 파괴된 그 새벽, 후아나가 코요티토를 안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집 안은 이미 뒤집혀 있었습니다. 침입자들은 불을 질렀습니다.
키노는 멀리서 “작은 불꽃”을 봤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집인 줄도 모르고. 달려오는 후아나를 보고서야 비로소 모든 것을 이해했습니다.
집이 타고 있었습니다. 생계도 타고 있었습니다.
이 장면의 잔인함은 단순히 재산을 잃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돌아갈 곳’이 사라졌다는 의미입니다.
집은 인간에게 안전이고, 존엄이고, 정체성의 상징입니다. 방화는 그저 재산 피해가 아닙니다. “너는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선언입니다.
이제 키노와 후아나에게 선택지는 없었습니다. 앞으로 나아가거나, 죽거나.
다섯 번째: 살인(Homicide) — 추적자들과의 최후
키노는 세 명의 추적자에게 쫓깁니다. 밤의 어둠 속에서 그는 결단합니다.
하나씩 처리합니다. 칼로, 총으로.
그리고 마지막 추적자, 구덩이 안으로 굴러 떨어져 죽어가던 그 사람에게 — 달빛 아래서 키노는 총을 겨눕니다. 두 눈 사이를.
그 직후, 돌산 옆 작은 동굴에서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들립니다.
코요티토였습니다. 총소리에 잠을 깬 아이가 울음을 터뜨렸고, 추적자 중 하나가 그 소리를 향해 총을 쐈던 겁니다.
스타인벡 진주 탐욕의 마지막 얼굴은 이것입니다. 진주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버텨온 키노가, 결국 지키려 했던 바로 그 아이를 잃은 것입니다.
키노는 피해자인가, 가해자인가
여기서 독자들이 가장 많이 던지는 질문이 있습니다.
“키노는 나쁜 사람이 된 걸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진주가 키노를 나쁜 사람으로 만든 게 아닙니다. 진주는 그가 속한 사회의 폭력성과, 그 안에서 살아남으려는 인간의 본능을 한꺼번에 드러냈을 뿐입니다.
의사도, 신부도, 진주 상인도, 추적자들도 — 그들 모두는 탐욕이라는 같은 뿌리에서 자란 존재들이었습니다. 스타인벡은 누구도 완전한 악인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스타인벡 진주 탐욕의 문제는 특정 개인이 아니라, 사회 구조 전체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소설은 이렇게 말합니다.
“For it is said that humans are never satisfied, that you give them one thing and they want something more.”
“인간은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고들 한다. 하나를 주면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마련이다.”
처음에는 진주를 지키려 했던 키노가, 결국 진주 때문에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던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악은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들기도 합니다.
『진주』가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스타인벡 진주 탐욕의 이야기는 1947년에 쓰였지만, 오늘날에도 전혀 낡지 않았습니다.
진주는 현대에도 다른 이름으로 존재하니까요.
돈, 권력, 명예, 성공, 인정.
『진주』의 진짜 공포는 진주가 악해서가 아닙니다. 평범한 인간도 욕망 앞에서는 얼마든지 악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의사는 사람을 치료하는 사람이었고, 신부는 영혼을 돌보는 사람이었고, 키노는 가족을 지키려는 아버지였습니다. 그런데 진주 하나가 등장하자 모두가 달라졌습니다.
여러분의 진주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것은 지금 당신을 어디로 데려가고 있습니까?
다음 글 예고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키노는 결국 그 진주를 바다에 던집니다.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그것을 놓을 수 있었습니다.
왜 그는 더 일찍 내려놓지 못했을까요? 그리고 진주를 던지는 그 행위는 패배일까요, 아니면 해방일까요?
3편에서는 『진주』의 결말을 통해 “버림”과 “자유”의 철학을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지난 글 바로보기 → 1편: “행운은 왜 재앙이 되었나?”]
[다음 글 바로보기 → 3편: “존 스타인벡의 『진주』 결말 의미 — 키노는 왜 진주를 바다에 던졌는가? “]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댓글로 의견 남겨주세요. 🙏
📌 참고 외부 링크
이 글은 필자의 학술 연구(황치복, 「존 스타인벡의 『진주』에 나타난 선악의 문제」, 『문학과 종교』, 2005) 및 30년 영문학 강의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