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스타인벡의 『미국과 미국인』, 학계가 외면한 4가지 이유
『미국과 미국인』(America and American)은 존 스타인벡이 1966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지 4년이 지난 예순넷의 나이에 내놓은 생애 마지막 논픽션입니다. 하지만 스타인벡 문학에서 이 책은 단순한 화보집이 아니라, 1960년대 미국 사회의 모순과 에너지를 정면으로 끌어안은 복합적인 문화적 텍스트로 다루어집니다. 이 글에서 이 책이 학계에서 오랫동안 외면받은 이유와, 그럼에도 다시 읽어야 할 문학적·인문학적 가치를 정리했습니다.
일본 오테몬가쿠인대학의 이시하라 쓰요시 교수는 2004년 논문 “John Steinbeck’s America: America and Americans (1966), the Neglected Work”에서 이 책을 “방치된 작품”이라 부릅니다. 필자가 2003년 산호세 주립대학교 마사 히즐리 콕스 스타인벡 연구센터에서 방문교수로 지내며 서고를 뒤지던 시절, 정작 스타인벡의 다른 소설들에 비해 이 책의 2차 문헌이 유난히 얇다는 사실을 직접 체감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시하라 교수의 분석은 그때 느꼈던 막연한 인상에 학술적 근거를 더해준 셈입니다.
스타인벡은 이 책의 서문에서 스스로 이렇게 고백합니다.
“In text and pictures, this is a book of opinions, unashamed and individual…. It cannot even pretend to be objective truth.”
글과 사진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부끄러움 없이 개별적으로 써 내려간 의견의 기록이며, 감히 객관적인 진실이라 흉내 내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곧이어 그는 이 책을 움직이는 힘 가운데 하나를 “a passionate love of America and the Americans”, 즉 미국과 미국인에 대한 열정적인 사랑이라고 밝힙니다. 비판적 현실 직시와 뜨거운 낙관주의라는 상반된 태도가 이미 첫 페이지에서부터 하나의 텍스트 안에 공존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 책은 미국을 객관적으로 정의하려는 사회과학적 연구서가 아니라, 스타인벡이라는 한 미국 작가가 평생 관찰하고 사랑하고 때로는 견딜 수 없어 했던 나라와 벌이는 마지막 대화에 가깝습니다.

찰리와 미국인, 뒤바뀐 어조
『미국과 미국인』을 제대로 읽으려면 4년 전 출간된 『찰리와 함께한 여행』(Travels with Charley: In Search of America, 1962)과 함께 놓고 봐야 합니다. 1961년 이 여행기를 위한 취재 도중 스타인벡은 뉴올리언스의 한 공립학교 앞에서 흑인 아이들을 향해 욕설을 퍼붓는 백인 여성 무리, 이른바 Cheerleaders를 목격합니다. 그는 이 장면을 두고 “my body churned with weary nausea”, 즉 “몸속이 지친 구역질로 뒤집혔다”고 적습니다. 여정의 끝에서 그는 결국 고향 뉴욕에서 길을 잃은 채 여행을 마치는데, “In Search of America”라는 부제를 생각하면 방향을 잃은 이 결말은 은유로 읽어도 무방합니다.

그런데 불과 3년 뒤인 1966년, 『미국과 미국인』의 마지막 장 “Americans and the Future”에서 그는 정반대의 목소리를 냅니다.
“I believe that our history, our experience in America, has endowed us for the change that is coming.”
“우리의 역사와 미국에서의 경험이 다가올 변화를 감당할 힘을 우리에게 주었다고 믿는다.”
같은 인종 문제, 같은 시대를 바라보면서도 어조가 완전히 뒤바뀐 것입니다. 이시하라 교수는 이 두 책 사이의 시간, 즉 1961년부터 1965년까지가 쿠바 미사일 위기, 케네디 대통령 암살, 베트남 전쟁 개입, 민권운동의 확산이 몰아친 미국사에서 가장 격동적인 시기였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시기에 스타인벡은 노벨문학상을 받고 케네디, 존슨 두 대통령과 개인적 친분을 맺으며 한 명의 소설가에서 국가적 공적 인물로 위상이 바뀌었습니다.
필자는 이 낙관의 급전환이야말로 노년의 스타인벡이 공적 인물로서 짊어진 책임감의 산물이라고 봅니다. 그는 케네디 대통령의 유명한 연설 구절, “국가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지 말고 당신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으라”를 직접 인용하며, 1962년 노벨상 수상 연설에서 밝혔던 인간 완성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그대로 이어갑니다. 문제가 심각할수록 그 문제를 극복할 인간의 에너지에 대한 믿음도 함께 강해진 것입니다.
그는 미국을 무너뜨릴 것은 갈등 그 자체가 아니라 “a bored and slothful cynicism”, 즉 지루하고 나태한 냉소주의라고 못박습니다. “The energy pours out in rumbles, in strikes and causes, even in crimes; but it is energy. Wasted energy is only a little problem, compared to its lack.” 에너지는 소요와 파업, 여러 운동, 심지어 범죄 속에서도 분출되지만 그것 역시 엄연한 에너지이며, 낭비된 에너지는 에너지가 결여된 것에 비하면 아무 문제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필자는 30년 넘게 스타인벡을 연구하며 반복해서 확인해온 하나의 패턴을 떠올립니다. 스타인벡은 어둠을 보여준 뒤 곧바로 낙관적 선언을 붙이는 작가가 아니라, 파괴와 생명력을 같은 장면 안에 놓고 그 긴장을 끝까지 유지하는 작가에 가깝습니다.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에서도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것은 추방과 굶주림, 착취와 죽음이지만 마지막 장면은 로자샨이 굶주린 낯선 이에게 젖을 먹이는 기묘하고도 강렬한 생명의 이미지로 끝납니다. 『미국과 미국인』의 낙관주의 역시 이와 같은 수사학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절망할 이유가 없어서 생겨난 낙관이 아니라, 절망할 이유가 너무 많기 때문에 오히려 선택된 낙관에 가깝습니다.
다문화주의 이전의 통합된 미국

세 번째로 짚어야 할 것은 인종과 통합의 문제입니다. 스타인벡은 첫 장의 제목을 “E Pluribus Unum”, 여럿에서 하나로 삼고, 다양한 인종과 민족이 결국 “미국인”이라는 하나의 정체성으로 녹아든다고 서술합니다. 인종 문제를 다룬 장의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We will not have overcome the trauma that slavery has left on our society, North and South, until we cannot remember whether the man we just spoke to in the street was Negro or white.”
“거리에서 방금 이야기를 나눈 사람이 흑인이었는지 백인이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게 될 때까지, 우리는 노예제가 우리 사회에 남긴 트라우마를 극복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이 문장 자체도 비판적으로 다시 검토할 여지가 있습니다. 인종적 차이를 “보지 않는 것”이 곧 평등인가라는 물음이 남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1980~90년대 다문화주의 학자들에게 이 통합된 미국상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역사학자 로널드 다카키는 미국에서 태어나고 평생을 산 자신에게도 “영어를 참 잘하시네요”라는 말을 듣는 순간이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스타인벡이 그린 매끄러운 동화의 서사와, 여전히 이방인 취급을 받는 소수자의 현실 사이에는 분명한 간극이 있습니다.
다만 필자는 여기서 균형점을 하나 짚고 싶습니다. 오랜 기러기 아빠 생활 동안 캐나다를 오가며 느낀 것은, 다카키가 말한 “이방인 취급”과 스타인벡이 말한 “동화의 힘”이 실은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어느 한쪽만으로 미국이나 이민 사회를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이시하라 역시 논문에서 같은 결론에 이릅니다. 미국이 통합되어 있는지 분열되어 있는지는 관찰자가 어느 지점에 서 있느냐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너무 아름다운 사진들, 그리고 세 가지 더

그렇다면 이렇게 시대의 맥박을 담아낸 『미국과 미국인』은 왜 학계에서 그토록 철저히 외면받았을까요. 이시하라는 이를 크게 네 가지 이유로 정리합니다.
첫째는 사진입니다. 이 책에는 저명한 사진작가들이 찍은 사진 백여 장이 실려 있는데, 몬태나의 자연부터 자유의 종, 링컨 동상까지 하나같이 아름답습니다. 문제는 그 사진들이 본문에서 스타인벡이 통렬히 비판한 인종 폭동, 빈곤, 환경 파괴의 현장을 거의 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백 장 가까운 사진 중 어두운 미국을 보여주는 것은 뉴욕 지하철의 지친 얼굴 사진과 할렘의 깨진 창문 사진, 단 두 장뿐이었습니다. 한 서평가는 이 책이 “너무 아름답다”고 지적했고, 크리스마스 선물용 도서로 기획되었다는 사정을 생각하면 납득이 가는 선택이지만, 결과적으로 노벨상 수상자의 이름을 앞세운 상업적 기획이라는 인상을 학계에 남겼습니다.
둘째는 스타인벡 자신의 학술적 위상 문제입니다. 스타인벡 연구자 도널드 노블은 포크너와 헤밍웨이 같은 동시대 노벨상 수상자들이 매년 백여 편의 논문에서 다루어지는 동안, 스타인벡은 겨우 열다섯에서 스무 편에 그친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워렌 프렌치 같은 대표적인 스타인벡 연구자조차 이 책을 “일반화와 고정관념의 범벅”이라 비판했을 만큼, 학계 내부에서도 스타인벡의 위상은 오랫동안 낮게 취급되었습니다.
셋째는 1960년대 후반부터 학계를 지배한 신좌파 사조와의 불협화음입니다. 베트남전 반대 운동과 구조적 사회 개혁을 외치던 신좌파 학자들에게, 전통적 도덕관을 강조하고 국가적 과오조차 넘치는 에너지의 부산물로 온정적으로 감싸 안은 스타인벡의 낙관주의는 받아들여지기 어려웠습니다.
넷째는 앞서 살펴본 다문화주의와의 거리입니다. 결국 이 네 가지 이유가 겹치면서 『미국과 미국인』은 대중적으로는 널리 읽히면서도 학계에서는 철저히 지워진 독특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
이시하라는 논문 말미에서 이 책을 “not a real America but Steinbeck’s America”, 실제의 미국이 아니라 스타인벡의 미국이라 정리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점 때문에 이 책은 여전히 가치가 있습니다. 스타인벡의 미국은 당대 수많은 미국인들이 마음속으로 그리던 미국과 정확히 일치했기 때문입니다.
『미국과 미국인』은 완벽한 학술서가 아닙니다. 사진은 지나치게 미화되어 있고, 논리는 때로 헐겁고, 낙관은 순진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 노작가가 자신의 조국을 이토록 솔직하게, 비판과 애정을 동시에 담아 써낸 책은 많지 않습니다. 미국은 문제가 없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 문제가 있으며 그 문제를 드러내고 싸울 에너지가 아직 살아 있기 때문에 희망을 걸 수 있는 나라라는 것, 그것이 스타인벡이 생애 마지막 책에 남긴 가장 정직한 형태의 애국심이었다고 필자는 생각합니다. 학계의 외면 속에 묻혀 있던 이 책을 지금 다시 꺼내 읽어야 할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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