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감수성 | 배달 교수의 인문학적 단상 3가지

봄 감수성은 “봄이 주는 특별한 감정의 결”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단순한 계절 감상이 아니라 나이 들수록 봄이 낯설어지는 중년의 심리를 담은 개념입니다. 이 글에서 배달 교수가 전주 봄길에서 건진 인문학적 단상 3가지를 정리했습니다.
좌회전을 위해 신호대기중에 코끝을 스치는 것은 달콤한 꽃향기가 아니라 주변에 자동차들이 내뿜는 매캐한 매연이었습니다.
올리브영 배송 물품을 싣고 전주 팔복동 철길 근처를 지나던 오후 5시쯤이었습니다.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었고, 차는 앞도 옆도 뒤도 막혀 꼼짝달싹 못 했습니다. 창밖으로 고개를 조금 내밀자, 하얀 꽃이 가득한 길과 그 아래로 모여든 사람들. 전주 이팝나무 축제였습니다. 사람들은 하얗게 부풀어 오른 나뭇가지 아래에서 사진을 찍고, 웃고, 오월을 소비하고 있었습니다. 봄 감수성이 넘치는 풍경이었습니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셔터를 한 번 눌렀습니다.
별 감흥은 없었습니다.
꽃은 분명 아름다웠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분명 들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 안에서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교통체증이 풀리기를 기다리는 마음만 있었고, 오늘 배송을 빨리 끝내야 한다는 생각만 있었습니다. 그리고 솔직하게, 이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왜 이렇게 자동차들과 사람들이 많지… 짜증나네.”
그 순간, 나는 아주 낯선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수십년간 대학 교단에서 영미문학을 강의하며 논하던 나 아니던가?, 좁은 골목을 누비며 시간을 다투는 딜리버리 집시로서의 내가 봄 감수성을 잃어버린 채 꽃터널 한가운데 갇혀 있었습니다.
60대가 된 나는, 봄 앞에서 왜 이리 조용해졌을까.
봄 감수성이 사라진 것인가, 바뀐 것인가 — 멈추던 사람에서 지나가는 사람으로
예전의 나는 달랐습니다. 꽃이 피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굳이 시간을 내서라도 가서 보고, 사진을 찍고, 괜히 더 오래 서 있었습니다. 삼십 대에는 아이와 함께 꽃구경을 나가며 봄을 행사처럼 챙겼습니다. 봄 감수성이 살아 있던 시절, 봄바람 한 번에도 몸이 먼저 반응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같은 꽃 아래에 있으면서도 전혀 다른 방향을 보고 있었습니다. 이 정체를 언제 빠져나갈 수 있을지, 다음 배송 도착지까지 몇분이나 더 걸릴지. 나는 꽃을 보고 있지 않았습니다. 꽃과 많은 인파와 자동차들 사이를 그냥 “통과”하고 있었습니다.
봄 감수성이 무뎌진 것인가, 아니면 다른 무언가로 바뀐 것인가.
영국 낭만주의 시인 존 키츠(John Keats)는 「엔디미온」(“Endymion”)의 첫 행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A thing of beauty is a joy for ever:
Its loveliness increases; it will never
Pass into nothingness; but still will keep
A bower quiet for us, and a sleep
Full of sweet dreams, and health, and quiet breathing. …
아름다운 것은 영원한 기쁨이다.
그 아름다움은 날이 갈수록 깊어지고,
결코 무(無)로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를 위해 고요한 쉼터 하나를 남겨두고,
달콤한 꿈과 건강함과,
그리고 조용하고 평온한 숨결로 가득 찬 잠 한 자락을 선물한다.
스물다섯에 결핵으로 세상을 뜬 키츠에게 봄 감수성은 생존의 문제였습니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이 곧 살아 있다는 증거였습니다.
그런데 나는 살아 있으면서도, 아름다움 앞에서 잠잠합니다.
혹시 이것이 키츠가 말한 “joy forever”의 다른 얼굴은 아닐까. 기쁨이 폭발하지 않는다고 해서 사라진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봄 감수성이 가슴에서 가라앉아 뼛속으로 내려간 것일 수도 있습니다.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가 말했듯, 젊을 때 자연은 감각으로 들어오지만, 나이가 들면 자연은 기억과 사유로 들어옵니다. 예전의 나는 꽃을 “봤고”, 지금의 나는 꽃을 보면서 “예전의 나”를 떠올립니다. 이것은 봄 감수성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즉각적인 반응에서 조용한 반추로 이동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확신하지는 못합니다. 솔직히, 그냥 피곤한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4월은 잔인한 달 — 봄 감수성과 기러기 아빠
T.S. 엘리엇(T.S. Eliot)은 『황무지』(The Waste Land)에서 이렇게 열었습니다.
April is the cruellest month,
breeding Lilacs out of the dead land, mixing
Memory and desire, stirring
Dull roots with spring rain.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망을 뒤섞으며,
봄비로 잠든 뿌리를 흔들어 깨운다.
보통 우리는 봄을 희망과 설렘으로 배웁니다. 그런데 어떤 순간의 봄은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봄이 오히려 무언가를 일깨우기 때문에 잔인하다고 했습니다. 이미 지쳐 있는 사람에게 봄은 감정을 다시 깨우라고 요구하고, 이미 혼자인 사람에게 봄은 더 많은 사람들을 보여줍니다.
기러기 아빠로 전주에 혼자 산 지 여러 해가 됐습니다. 아내와 딸, 그리고 강아지 모카는 캐나다 런던에 있습니다. 봄 감수성을 함께 나눌 사람이 옆에 없는 것이, 봄을 이토록 잠잠하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함께 서서 사진을 찍어줄 사람이 없다는 단순한 사실이, 어느 순간부터 계절의 감각까지 바꾸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제게 잔인한 것은 이팝나무 꽃의 화려함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아름다움에 반응할 여유를 잃어버린 저 자신의 메마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꽃잎이 떨어지는 것이 슬픈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소중한 물건이 늦어지는 것이 더 큰 걱정거리가 된 지금의 나는, 분명 예전과는 다른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달라짐이 꼭 서글픈 일만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배송을 하며 만난 인근 아파트의 한 경비원 아저씨의 표정이 잊히지 않습니다. 축제를 즐기려 아파트 단지내에 불법 주차 차량을 통제하며 연신 땀을 닦던 그분에게 시원한 배즙 음료 하나를 건넸을 때, 그분의 눈가에 번지던 짧은 미소는 이팝나무 꽃보다 훨씬 더 선명하게 다가왔습니다. 그 순간 깨달았습니다. 내가 느끼는 봄 감수성의 무뎌짐은 단순한 메마름이 아니라, 허영을 걷어내고 삶의 본질을 바라보려는 사유의 과정일 수도 있다는 것을.
스타인벡(John Steinbeck)의 『통조림 공장가』(Cannery Row)에는 이런 관찰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제각각이듯, 기쁨을 느끼는 방식도 제각각이라는 것입니다. 축제장을 찾아 꽃 아래 서는 것만이 봄을 사는 방식은 아닐 것입니다. 차창 너머로 그 풍경을 스치면서, 그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도 봄 감수성의 한 형태입니다. 봄 감수성이란 설레는 감정만이 아닐 것입니다. 봄 안에 있으면서 봄을 관찰하는 것, 봄을 느끼지 못한다고 느끼는 것, 그것도 봄 감수성의 한 형태일 수 있으니까요.

봄 감수성의 가장 성숙한 형태 — 봄은 내가 없는 자리에서도 피고 진다
결국 나는 그 길을 빠져나왔습니다. 꽃은 여전히 피어 있었고, 사람들은 여전히 웃고 있었고, 나는 다시 올리브영 물건 배송을 이어갔습니다.
그날 저녁, 혼자 밥을 먹으면서 그 장면을 다시 떠올렸습니다. 꽃은 분명히 거기 있었습니다. 아름다움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나는 그것을 설레는 방식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입니다. 예전에는 꽃 앞에서 멈췄고, 지금은 꽃 옆을 지나갑니다. 예전에는 누군가와 함께 봄을 나눴고, 지금은 혼자서 봄을 생각합니다. 그 차이가 조금은 쓸쓸하게 느껴지지만, 완전히 나쁜 것만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키츠가 말한 것처럼, 아름다운 것은 영원한 기쁨입니다. 그 기쁨이 지금 당장 가슴을 두드리지 않는다고 해서 사라진 것은 아닐 것입니다.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는 「무지개」(“My Heart Leaps Up”)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My heart leaps up when I behold A rainbow in the sky:
So was it when my life began;
So is it now I am a man;
So be it when I shall grow old,
Or let me die!
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
하늘에 무지개가 걸릴 때
내 가슴은 뛴다.
삶이 시작되던 그 시절에도 그러했고,
어른이 된 지금 이 순간에도 그러하며,
늙어서도 그러하기를 바란다.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죽음을 달라.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무지개를 보면 가슴이 뛴다고, 어릴 때도 그랬고 어른이 된 지금도 그러하며, 늙어서도 그러기를 바란다고 그는 썼습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한 줄, “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으로 시를 맺습니다. 어린 시절의 감수성이 어른의 내면을 만들어낸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나는 지금 그 무지개 앞에서 가슴이 뛰지 않습니다. 이팝나무 꽃 터널 아래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워즈워스가 두려워했던 바로 그 상태, “Or let me die(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죽음을 달라)”고 했던 그 감각의 소멸 앞에, 나는 지금 서 있는 것일까요.
아마 아닐 것입니다. 봄 감수성은, 우리가 설레든 설레지 않든, 왔다가 갑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아는 것이, 어쩌면 봄 감수성의 가장 성숙한 형태일지도 모릅니다. 워즈워스가 꿈꿨던 어린 시절의 설렘은 사라졌지만, 우리는 설렘이 떠난 자리에 들어선 단단한 책임감을 성숙이라고 부르기로 했으니까요. 어린이가 어른의 아버지라면, 그 어른은 이제 꽃 앞에서 소리치는 대신 조용히 그 자리를 기억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날 밤, 캐나다에 있는 딸에게서 카톡문자가 왔습니다. “아빠, 거기 지금 꽃 많이 폈어?” 나는 신호대기 중에 찍은 창밖의 이팝나무 사진을 하나 골라 보냈습니다.
“예쁘다.”
그래. 예쁘긴 했다.
창밖에는 여전히 하얀 이팝나무 꽃들이 어둠 속에서 등불처럼 빛나고 있었습니다. 봄 감수성은 사라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조용해진 것이었습니다. 오월의 봄은, 내가 없는 자리에서도 피고 집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생각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봄 안에 살고 있는 것 아닐까요.
[내부 링크]
→ 기러기 아빠 관련 Life & Humanities 이전 포스트
→ 『생쥐와 인간』 컬리 부인 — 이름 없는 3가지 이유
[외부 링크]
→ 존 키츠 「엔디미온」 위키소스 원문
→ 2026 전주 이팝나무 축제 공식 안내

한 줄 요약: This text means that many people in the world usually just pass away the beauty of the world.
내가 배운 표현: let me die 죽게 내버려두세요
내 생각: 사람만이 가지는 아름다움은 제각각이며 보는 시각에 따라 그 아름다움이 달라질 수 있음을 알았다. 어린 시절의 감수성이 어른의 내면을 만들어낸다는 것이 인성적이고 공감되게 만들었다.
학번: 26510063 / 이름: 오채원
한줄 요약: Spring sensibility in our later years is not about losing our emotions, but about learning to appreciate beauty quietly while carrying the weight of life’s responsibilities.
내가 배운 표현: Pass through (스쳐지나가다 / 통과하다)
내 생각: 예전처럼 꽃을 보고 설레지 않는건 감정이 메마른 게 아니라 삶의 경험이 쌓이면서 내면이 더 깊고 단단해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