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왜 자연 앞에서 무너지는가 — 『미지의 신에게』 3가지 철학으로 읽기
『미지의 신에게』는 대지를 향한 인간의 원초적인 갈망과 숭배다. 하지만 스타인벡 문학에서는 단순한 토지에 대한 집착을 넘어, 자연과 하나가 되고자 하는 범신론적 광기와 비이성적 생명력의 상징으로 깊이 있게 다루어진다. 이 글에서 현대 문명인이 상실한 대지의 영성이 어떻게 스타인벡 문학의 철학적 원형으로 승화되었는지를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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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타인벡의 『미지의 신에게』(To a God Unknown)는 오랫동안 “미완성 습작”으로 저평가되어 왔다. 1933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초기작 가운데 가장 철학적이고 신화적인 색채를 띠며, 실제로 현실과 환상, 종교와 원시신앙, 인간과 자연의 경계가 뒤섞여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이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문학적 가치이기도 하다.
필자가 『미지의 신에게』를 처음 손에 든 것은 스타인벡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던 1990년대 초였다. 당시만 해도 이 작품은 스타인벡 연구자들 사이에서조차 크게 주목받지 못하던 분위기였다. 그런데 텍스트를 읽어 내려가면서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주인공 조셉 웨인(Joseph Wayne)이 젖은 풀밭에 얼굴을 파묻고 대지에 자신의 몸을 내던지는 첫 장면부터, 이 소설은 인간이 자연과 어떻게 근원적으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충격적일 만큼 직접적인 언어로 보여주고 있었다.
2003년 연구년을 맞아 캘리포니아 살리나스의 스타인벡 생가를 방문하고 국립 스타인벡 센터(National Steinbeck Center)에서 자료를 조사하며, 그리고 산호세 주립대학교의 마사 히즐리 콕스 스타인벡 센터(The Martha Heasley Cox Center for Steinbeck Studies)에서 방문교수로 지내는 동안, 필자는 이 작품을 둘러싼 전기적 맥락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살리나스의 건조한 대기 속에서 황금빛 들판을 바라보며, 비로소 조셉이 왜 그토록 땅에 집착했는지, 왜 마지막에 스스로 손목을 베어 대지에 피를 바쳐야만 했는지를 몸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이 글에서는 『미지의 신에게』가 단순한 신비주의 소설이 아니라, 범신론·비인간주의·비이성주의라는 세 개의 철학적 기둥 위에 세워진 스타인벡 문학의 숨겨진 걸작임을 논증하고자 한다.
1. 『미지의 신에게』의 탄생 배경 — 개인적 상처와 철학적 사유의 교차
『미지의 신에게』는 스타인벡이 몬트레이(Monterey)에 거주하던 시절에 집필된 세 번째 소설이다. 이 작품의 저작 배경에는 두 가지 층위가 존재한다. 하나는 스타인벡이 평소 견지하던 범신론적 세계관이고, 다른 하나는 당시 그의 개인적 삶에서 비롯된 깊은 정서적 상처다.
마이클 제롬 한슨(Michael J. Hanson)의 연구에 따르면, 스타인벡의 첫 번째 부인 캐롤(Carol Henning Steinbeck)과 신화학자 조셉 캠벨(Joseph Campbell)의 감정적 연루 사건이 이 소설 집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스타인벡은 캠벨에게 집필 중이던 소설을 소개하면서 “자연은 살아 있으며, 이 농장은 살아있는 신전과 같다(Nature is alive. The homestead is like a living tabernacle)”고 말한다. 두 사람은 전체론적 철학 체계에서 서로의 사고가 일치함을 발견하지만, 동시에 캐롤의 강한 감정적 에너지는 캠벨을 향해 흘러간다. 스타인벡은 이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삼각관계를 소설 속으로 끌어들여, 인간의 욕망과 자연의 힘을 동일시하는 방식으로 승화시킨다.
이와 함께 에드 리케츠(Ed Ricketts)의 비목적론적 사유, 로빈슨 제퍼스(Robinson Jeffers)의 비인간주의(Inhumanism), 그리고 아르투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의 비이성주의가 『미지의 신에게』의 철학적 토대를 이룬다. 스타인벡은 이 소설에서 “인간은 모든 자연적인 과정이 만들어낸 범주 속에 전적으로 내재되어 있다”는 자신의 핵심 신념을 서사화한다.

2. 조셉 웨인과 범신론 — 『미지의 신에게』에서 대지는 살아 있는 신전이다
『미지의 신에게』의 주인공 조셉 웨인은 단순한 농부가 아니다. 그는 대지와 신비로운 합일을 꿈꾸는 범신론적 세계관의 화신이다.
소설의 첫 장면부터 이 특별한 성격이 드러난다. 서부 캘리포니아에 도착한 조셉은 새로 개척한 농토에 엎드려 얼굴을 젖은 풀에 파묻는다.
“He flung himself face downward on the grass and pressed his cheek against the wet stems. His fingers gripped the wet grass and tore it out, and gripped again. His thighs beat heavily on the earth.”
그는 그의 뺨을 축축하게 젖은 줄기들에 대어 풀밭에 얼굴을 마주하고 누웠다. 그의 손가락들은 그 젖은 풀들을 움켜쥐고 나서 찢듯이 뽑아내고, 또 다시 움켜쥐었다. 그의 허벅지는 땅 위로 힘차게 부딪혔다.
이 장면은 단순한 농부의 기쁨이 아니다. 스타인벡의 범신론적 세계관 안에서,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어머니 자연으로부터 분리되며 그 분리는 영구적인 결여로 남는다. 조셉의 이 격렬한 행위는 그 원초적 결여를 메우려는 본능적 충동이다. 자연과 합일하려는 인간의 가장 깊은 욕망이 이 한 장면 속에 압축되어 있다.
이러한 범신론적 태도는 조셉이 아버지의 영혼이 집 옆 거대한 오크나무(Great Oak)에 깃들었다고 느끼며 그 나무에 헌주(獻酒) 의식을 올리는 장면에서도 이어진다. “아버지, 와주셔서 기쁩니다(I’m glad you’ve come, sir)”라는 조셉의 중얼거림은, 인간의 영혼과 자연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범신론의 핵심을 응축한다. 오크나무는 조셉에게 또 하나의 신의 현현(顯現)이다. 자연은 단지 물리적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죽음, 그리고 영혼을 품는 살아 있는 신전인 것이다.
소설 속 빈터의 신비로운 바위 장면도 이 주제를 심화한다.
“In the center of the clearing stood a rock as big as a house, mysterious and huge. It seemed to be shaped, cunningly and wisely, and yet there was no shape in the memory to match it.”
빈터의 중앙에는 집채만큼 큰 바위가 있었다. 그 모습은 신비하고 웅장했다. 그 형태가 마치 교묘하고 현명하게 보였지만, 기억하는 한 그런 바위를 본 적이 없었다.
이 장면에서 스타인벡은 놀랍도록 절제된 언어를 쓴다. “신비하고 웅장하다”고만 할 뿐, 더 이상 설명하지 않는다.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연의 신성(神性)은 언어로 포획되는 순간 이미 그 본질을 잃는다는 것을 스타인벡은 알고 있었다. 이 바위는 소설 속 어떤 인물보다 오래 살아남는다. 조셉도, 엘리자베스도, 가뭄도 지나가지만 바위는 남는다. 스타인벡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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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로빈슨 제퍼스의 비인간주의 — 인간은 자연의 중심이 아니다
『미지의 신에게』를 제대로 읽으려면 로빈슨 제퍼스의 비인간주의(Inhumanism)를 이해해야 한다. 제퍼스는 몬트레이 지역에 거주한 생태시인으로, 스타인벡과 지리적·사상적으로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제퍼스의 비인간주의는 인간 혐오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교만한 착각에서 벗어나, 자연이라는 더 크고 위대한 유기체의 일부로 스스로를 겸손하게 인식하는 사유다.
“To best become human we must inhumanize ourselves; to more surely find the divine we must learn a larger, more reverent, more ecstatic creaturehood.”
최고의 인간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비인간화해야 한다. 신성한 것들을 보다 확실하게 찾기 위해 우리는 보다 크고 보다 경건하고 보다 황홀한 창조물성을 학습해야 한다.
제퍼스의 이 신념이 『미지의 신에게』 전반에 깊이 스며들어 있다. 조셉은 가족의 죽음 앞에서도 과도하게 슬퍼하지 않는다. 소설은 “그의 심장이 멎는 듯했고 먹먹해졌다. 그러나 그는 슬프지 않았다(His mind was inert and numb, but there was no sadness in him)”고 기술한다. 이것은 냉담함이 아니라 제퍼스가 말하는 비인간주의적 초연(detachment)이다. 인간의 감정보다 더 큰 자연의 질서 속에 자신을 위치시키는 방식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조셉의 아내 엘리자베스(Elizabeth)의 죽음이다. 그녀는 바위를 향해 저항할 수 없는 끌림을 느끼며 “나는 그 바위를 사랑했어요. 그 돌은 당신이나 우리의 아이, 또는 내 자신보다 더 사랑했어요(I love the rock more than you or the baby or myself)”라고 고백한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자연의 원초적 인력(引力)이 담긴 이 장면은, 이후 엘리자베스가 그 바위 근처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사건으로 이어진다. 제퍼스와 스타인벡은 공통적으로 묻고 있다. 인간이 자연보다 우월하다는 믿음은 진실인가? 아니면 인간은 자연이라는 거대한 유기체의 하나의 세포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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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ional Steinbeck Center — https://www.steinbeck.org
4. 조셉의 자기희생 — 쇼펜하우어의 비이성주의와 신성한 귀환
『미지의 신에게』의 절정, 즉 조셉이 스스로 손목을 베어 가뭄으로 죽어가는 대지에 자신의 피를 바치는 장면은 이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가 수렴되는 지점이다.
“He took out his knife again and carefully, gently opened the vessels of his wrist. … ‘I should have known,’ he whispered. ‘I am the rain.’ … ‘I am the land,’ he said, ‘and I am the rain. The grass will grow out of me in a little while.'”
그는 칼을 다시 꺼내어 그의 손목을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그었다. … “나는 알았어야 했어.” 그가 속삭였다. “나는 비야.” … “나는 대지야.” 그가 말했다. “그리고 나는 비야. 이제 곧 내 몸에서 풀이 자랄 거야.”
이 장면을 쇼펜하우어의 비이성주의 철학으로 읽으면, 단순한 광기가 아니라 심오한 철학적 고백으로 다가온다. 쇼펜하우어는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The world is my representation)”라고 선언한다. 인간이 인식하는 세계는 이성이 지배하는 합리적 질서가 아니라, 맹목적인 삶의 의지(will)가 만들어낸 표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조셉이 자신이 “비이고 대지”라고 말하는 순간, 그는 이성의 경계를 넘어 자연과의 완전한 합일에 도달한다. 이것은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해탈의 경지, 즉 주체와 객체가 하나가 되는 “타트 트밤 아지(Tat tvam asi, 이것이 바로 너다)”의 순간이다. 조셉의 죽음은 비극이 아니다. 분리되었던 자아가 자연으로 귀환하는 신성한 완성이다.
이 지점에서 『미지의 신에게』는 이후 스타인벡 문학과 분명한 연결고리를 형성한다. 조셉 웨인의 희생은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에서 짐 케이시(Jim Casy)가 보여주는 희생 모티프의 원형처럼 읽힌다. 스타인벡 문학에서 인간은 종종 공동체와 자연을 위해 자기 자신을 바치는 존재로 등장한다. 『에덴의 동쪽』(East of Eden)의 신화적 상징, 『진주』(The Pearl)의 원초적 욕망, 『붉은 조랑말』(The Red Pony)의 생명순환 사상이 모두 이 작품 안에 응축되어 있다. 『미지의 신에게』는 스타인벡 문학의 습작이 아니라 원형이다.
🔗 외부링크
The Martha Heasley Cox Center for Steinbeck Studies — https://www.sjsu.edu/steinbeck
결론 — 『미지의 신에게』는 왜 지금 다시 읽어야 하는가
오늘날 기후위기와 생태계 파괴가 일상이 된 시대에, 스타인벡이 1930년대에 이미 예감했던 이 통찰은 놀라울 만큼 현재적이다. 가뭄의 이미지는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 내부의 정신적 황폐함과 연결된다. 땅이 메마르는 순간 인간의 영혼 역시 함께 메마른다.
수년간 이 작품을 연구하며 필자가 내린 결론은 명확하다. 스타인벡은 이 소설을 통해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는 주인이 아니라, 자연의 거대한 흐름 속에 잠시 머물다 가는 존재임을 역설하고 있다. 범신론·비인간주의·비이성주의라는 세 개의 철학적 렌즈로 읽을 때, 『미지의 신에게』는 전혀 다른 풍경을 열어 보인다.
“나는 대지다(I am the land)”라는 조셉의 마지막 외침은, 오늘날 생태적 단절을 겪고 있는 우리 모두가 깊이 새겨야 할 경구다. 스타인벡은 묻고 있다. 인간은 정말 자연의 주인인가. 아니면 잠시 땅 위를 지나가는 아주 연약한 생명에 불과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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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한 줄 요약:
To a God Unknown shows that humans are deeply connected to nature and cannot escape its power.
2.내가 배운 표현:
“Nature is alive.” → “자연은 살아 있다.”
“I am the land.” → “나는 대지다.”
“Humans are not the center of nature.” → “인간은 자연의 중심이 아니다.”
3.내 생각:
이 글을 읽으면서 인간이 자연을 지배한다고 생각하는 태도를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특히 조셉이 자신을 대지와 하나라고 말하는 장면이 인상 깊었다. 현대 사회에서도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느꼈다.
26510004 고지명
한 줄 요약:
The text highlights that Steinbeck’s literary world is built on the belief that humans are not masters of nature but integral parts of a larger living organism.
내가 배운 표현:
Nature is like a living tabernacle — 자연은 살아있는 신전과 같다 (자연을 경건하고 신성한 장소로 비유하는 표현)
내 생각:
이 글을 통해 생명을 유지하는 근간인 ‘대지’와 인간의 연결성에 대해 깊게 생각해보게 되었다. 특히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는 ‘비인간주의’ 관점은 환경과 인간의 상호작용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다시금 생각하게 했다. 조셉의 희생이 단순한 비극이 아닌 자연으로의 귀환이라는 해석이 매우 인상 깊었으며, 저 또한 생명을 다루는 예비 의료인으로서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깊이 존중해야겠다고 다짐했다.
26510026 김지민